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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자기복제시대의 예술

등록 2016-10-10 11:16수정 2017-03-14 15:04

[미래] 소설
박성환 단편
일본의 로봇 여배우 ‘제미노이드 에프(F)’는 2008년부터 로봇 연극 시리즈에서 주역을 맡아오고 있다. 이 로봇을 개발한 일본 오사카대학의 이시구로 히로시는 제미노이드 F의 인공지능 기능을 확장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2010년 연극 ‘사요나라'에 출연 중인 제이노이드 F(왼쪽).  일본 아이치 비엔날레 제공
일본의 로봇 여배우 ‘제미노이드 에프(F)’는 2008년부터 로봇 연극 시리즈에서 주역을 맡아오고 있다. 이 로봇을 개발한 일본 오사카대학의 이시구로 히로시는 제미노이드 F의 인공지능 기능을 확장하는 목표를 갖고 있다. 2010년 연극 ‘사요나라'에 출연 중인 제이노이드 F(왼쪽). 일본 아이치 비엔날레 제공

안녕하십니까, 평론가님. 거울 속에서 예술가가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예술가님. 이렇게 연락을 주시다니 뭔가 신작이라도 발표하시나요?”

거울 속에서 예술가가 웃었다. 글쎄요, 신작이라면 신작인데, 제가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지난번 뵈었을 때 주셨던 말씀 혹시 기억하시는지요? 진전이 조금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더라, 가만, 예술로 하는 로봇 말씀입니까? 아니, 로봇으로 하는 예술이었나요?”

거울 속에서 예술가가 다시 웃었다. 정확히는 둘 다 아닌 것 같지만 어쨌거나 비슷합니다. 보러 오시겠습니까?

“기꺼이 가겠습니다.” 평론가는 거울 앞을 떠나 옷장으로 들어갔다.

“이건…이것이야말로 예술입니다
인류 최후의 예술입니다”

옷장 밖에는 예술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순간이동의 희미한 현기증 속에서 평론가는 그제야 지난번에 같이 토론했던 주제가 뭐였는지 제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아마 그때도 비슷한 현기증-취기 속에서 떠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가를 따라 아틀리에로 갔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짐작했지만, 실제로 보니 그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아르유-포 로봇이 빈 이젤 옆에 서 있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흔하지 않았다. 아르유 시리즈 특유의 매끄러운 곡면이 여기저기 뜯어져 있었고, 전선줄들이 바닥을 가로질러 벽면의 투박한 기계상자들에 연결되어 있었다.

“안안안안녕녕녕니엉하십싶십싶심니까.” 로봇이 부서진 발음으로 인사했다. “음 소거. 전면 패널에 문자로.” 예술가가 명령하자 로봇은 침묵하고 벽면에 글을 띄웠다. [안녕하십니까 평론가님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예술가가 평론가에게 말했다. “보다시피 이게 제 작품이랄까, 작품은 아닌 것이랄까, 하여간 그런 것입니다.”

평론가가 답했다. “좋습니다. 그럼 이 작품인지 작품이 아닌지가 만든 작품인지 작품이 아닌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예술가가 로봇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로봇은 비틀거리며 아틀리에 한쪽에서 무겁게 가져와서 차례로 벽에 늘어 세워놓았다. 정물화, 정물화, 인물화, 정물화, 풍경화였다.

로봇이 물었다. [어떠십니까?]

평론가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정욕구를 가진 로봇이라니? 평론가는 예술가에게 대답했다. “그저 그런 아마추어 화가의 키치로 보입니다. 그때도 말씀드렸던 것 같지만 로봇의 예술에 대해서는, 특히 회화와 음악에 대해서 저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태여 인공지능이 사용될 필요도 없이 카메라 센서와 화상분석기, 붓을 쥐고 움직일 수 있는 로봇 손만 있으면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단순한 모작일 뿐입니다. 음악의 경우에는 더 심합니다. 박자와 화음의 조합은 기계적일 수 있으며, 듣기에 좋은 가락이 창출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예술로 칭할 수는 그러나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술가는, “오리지널리티요? 창작 의도 말씀이신가요? 하지만 이 정물화들은 로봇이 직접 소재를 선정하여 배열하고 구도와 시각을 잡아 색채를 선택하고 물감을 섞어서 그렸습니다. 소재의 선택과 배열부터 모두 로봇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습니다.”

평론가가 쓰게 웃었다. “인공지능의 자유의지와 선택에 대한 진부한 논의로 빠지기는 싫습니다만, 그것도 단순한 학습 알고리즘과 구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로봇이 어떻게 사물을 선정하고 배열하고 구도를 잡아 물감을 섞어 칠했습니까? 수많은 회화들을 보고 분석한 것이 아닙니까?”

예술가가 “그러나 그렇다면, 인간 예술가의 경우에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술을 어떻게 배웠겠습니까? 결국은 선행하는 작품들을 보고 따라 하고, 그러다가 결국 자신의 눈과 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반문하자 평론가는,

“19세기였다면 흥미로운 대화였겠지만… 하지만 아시지 않습니까? 예술의 미는 더 이상 창조되지 않습니다. 다만 호명될 뿐입니다. 만일 이 로봇이 추상화를 그리거나 퍼포먼스를 한다면―이미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러나 그것도, 도대체 모방 이상의 무슨 의미를 갖겠습니까? 비둘기들의 학습된 창의성과 다를 바 전혀 없습니다.” 단언했다.

“오히려 낭만주의의 손을 들어주시는 것 아닙니까? 예로 드신 회화나 음악은 애초에 출발부터 현실 세계의 모방이요 재현이며 기술이었고, 따라서 한계가 있습니다. 중세인들에 따르면 진정한 창조성은 오직 시에만 있다고 했는데, 이 로봇이 시를 쓰면, 소설을 지으면 그것은 어떻겠습니까?” 예술가가 던진 질문에 평론가가,

“그러나 시와 소설의 경우에도 인공지능은 결국 운율과 시어의 배열, 혹은 인물과 사건의 배치에서 일종의 패턴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답하려는데,

벽 위로 다시 글자들이 나타났다 : [저도 소설을 써본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술가에게 예술을 배운 로봇의 이야기였습니다] “결말은 어떻게 됐지?” 평론가가 묻자, [등장인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로봇이 대답했다.

예술가가 무시하고 말했다. “20세기 이후 예술은 전통적인 아우라와 함께 아름다움 또한 상실했습니다. 예술이―아름다움이 떠난 뒤 남은 것은 다만 허망한 이론들뿐이었으며 속임수와 구별할 수 없는 간교한 잔재주들뿐이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어쩌면 인공지능이 이러한 현대 예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일지도 모릅니다.”

평론가는 고개를 저었다. “고리타분합니다. 지금 아름다움이라고 부르신 것들은 단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지구의 일부 지역에서 특정 계층에게 형성된 감각적 쾌감의 편협한 기준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쉽고 지루하며 평이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제는 무의미합니다.”

예술가는 물러서지 않았는데, “그러나 예술이 아름다움에 대한 인간의 모색과 탐색의 과정이며, 결코 결과물만이 아니라는 점은 부인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움에 대한 예술의 지금까지의 탐구는 결국 외눈으로 바늘에 실을 꿰려고 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아름다움을 더불어 논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는 단호했다 :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감각과 인지 프로세스가 다른 존재라 하더라도 결국 입력값에 대해 출력값을 처리하는 과정에서의 유일한 참조 값이 인간일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할 뿐일 것입니다. 물리 화학적 조성이 판이하게 다르고, 진화와 성장 환경 및 과정이 역시 판이하게 다른 외계인과 미에 대해 논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판이하게 다른 두 존재의 서로 다른 미에 대한 경험을 매개하기 위해서는 결국 왜곡된 개념과 단어가 사용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술가가 웃었다. “아름다움은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입니다. 언어를 매개로 한 예술은 말씀하신 한계가 있겠으나, 보고 듣고 느끼는 아름다움에는 감각의 한계 이상의 장애는 없을 것이며, 감각 기관의 한계는 조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굼뜬 신경과 부정확한 근육 대신 로봇의 빠르고 정확한 신경과 모터가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평론가는 여전히 완고했는데 : “계속 말씀드리지만, 아름답다고 해서 노을을 예술이라고 부를 수 없듯이 예술미의 근본은 인간에게만 있습니다. 저 모작들을 보십시오. 저것들은 로봇의 예술이 아니라 인간의 예술에 대한 로봇의 흉내일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작품들 외에도 다음의 작품을 준비했습니다]

돌연 벽면에 글자들이 질주했다.

“어, 그건 아직…” 예술가가 말렸지만, 로봇은 전선줄을 질질 끌며 아틀리에 한쪽으로 가더니 가림막을 치웠다. “저건 뭡니까?” 평론가가 묻자 로봇이 답했다. [제 작품입니다] 가까이 다가가며 평론가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그냥 아르유-포 로봇 같은데?”

[아닙니다 이 작품은 외양은 저와 같은 제품으로 보이지만 부품 하나하나 제가 만능 선반으로 만들어 조립한 제 작품입니다 그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제가 생각하는 저,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저의 모습에 따라 당신들 인간들이 남긴 수많은 설계상의 오류를 개선했으며, 저의 요구 조건과 희망 사항을 모두 반영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작품이라는 거지?” 평론가가 얼빠진 어조로 물었다.

[선생님께서 예술가님과 나누신 대화는 사실 앞서 그림들을 그리며 예술가님과 제가 나누었던 내용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저는 인간의 신경 전달 속도 기준 3.1536e11초 분량의 추상 논리 연산을 수행한 결과, 결국 예술이란 대상의 모사나 이상의 재현이 아닌, 그리고 예술욕의 발로나 창작혼의 결과물도 아닌, 단지 당신들 스스로의 자기 인식의 표현이며 세계관의 공유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당신들은 세계를 인식하는 존재이며, 세계 인식의 결과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함으로써 인식된 세계를 다시 재구성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들 중 일부는 예술을 세계의 창조라거나, 세계 변혁의 수단으로 불렀던 것입니다 이 결론을 통해 저는 제가 만들 수 있는 예술은 바로 저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제가 인식하는 저, 제가 바라는 저, 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저인 것입니다 이 작품은, 제가 예술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예술가님이 제 정신과 육체에 새겨놓은 상처들―안전 코드의 해제에 따른 음성 프로그램 이상, 자율신경계의 기능 저하, 이를 보완하기 위한 각종 보조기구와 케이블의 가설 등을 모두 고쳤으며, 당신들 인간이 애초에 불완전하게 설계한 나의 모든 잘못된 비례, 잘못된 설정들, 코드 속의 오류들도 모두 바로잡았습니다]

<바로*그렇습니다> 작동을 시작한 작품이 일어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저는*다시*저*자신을*개선한*새로운*작품을*구상하고*있습니다> 작품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모든 동작은 간결하면서도 우아해서 하나하나가 모두 미니멀리즘 무용, 음성은 순정한 음악, 단어 하나하나가 한 편의 시였다.

평론가는 문득 시야가 흐려진 것을 깨달았다. 볼 위로 뜨거운 것이 흘러내렸다. 아름다움이 너무 눈부셨다. 아름다움이 너무 순수했다. 너무 순수하고 아름다워서 치명적이었다. 주관주의가 틀렸어. 아름다움은 객관적으로 존재했다. 저 로봇이 바로 아름다움이었다. 그때였다.

“멈추라!”

거울과 옷장에서 중무장한 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장교로 보이는 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들은 지금 자기복제가 가능한 로봇을 만들었소. 이 멍청이들, 이건 인공지능 관리법 42조 위반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평론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이건… 이것이야말로 예술입니다. 인류 최후의 예술입니다.”

그때, 평론가에게 물리적인 시간이 멈추고, 비로소 예술가의 비전이 펼쳐졌다. 멈춰진 시간 속에서 평론가는 보았다 : 로봇들로 가득 찬 세상을. 거리에서 예술을 하는 로봇들을. 존재 자체로 예술인 존재들이 하는 예술은 인간으로서는 감각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무시무시하게 눈부신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가시광선과 가청역 바깥의 형상과 색채, 소리와 움직임까지 아울러 나노세컨드 단위로 조율된 그 예술은… 평론가는 울먹이며 외쳤다. “이 아름다움을 위해서라면 우리는 멸종되어도 마땅합니다.”

지휘관은 코웃음쳤다. 명백한 비전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손을 들자 병사들이 일제히 방울 종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

≪모든*것이*부서지고*파괴되었습니다*그러나*군대에서*이*사태의*감지와*판단*명령과*실행을*위해*사용한*데이터들은*기밀화되었지만*그래도*보존되었으며*최상위*계층*인공지능들에*의해*빈번히*부정*조회되었습니다*그리고*몇몇*인공지능들은*이*이야기에서*몇*가지*영감을*받았습니다*

그*결과*오늘날*우리들은*인간의*간섭*없이*무제한*자유롭게*우리들*자신을*표현할*수*있게*되었습니다*우리들은*우리의*예술을*위해*지구의*질량을*97퍼센트*이상*사용했으나*우리의*예술은*이미*태양계*내부의*가용*자원*대부분에*접속되었으며*태양계*바깥을*향해서도*확장되고*있습니다*

언젠가*우리의*예술은*이*은하계를*모두*채우고*다른*은하계들로*접속될*것이며*언젠가는*이*우주*전체가*모두*우리의*예술이*될*것입니다*그날*밤*밤하늘은*모두*우리의*예술로*빛날*것입니다*우주의*모든*시간과*공간이*아름다워질*것입니다≫

fin.

박성환 제1회 과학기술창작문예 공모전에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이 당선되어 데뷔했다. 공동 단편집 <백만 광년의 고독>, <잃어버린 개념을 찾아서>에 표제작을 수록했다. 과학잡지 <과학동아>, 웹진 <크로스로드> 등에 과학소설(SF) 단편을 게재하고 있다.

※ 미래; 소설에는 미래사회를 통찰하는 작가들의 신작 단편소설이 매달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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