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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보다 소중한 것들

등록 2016-10-14 19:22수정 2016-10-14 19:41

[토요판] 이주의 시인, 이장욱
내 인생의 책

그것은 내 인생이 적혀 있는 책이었다. 어디서 구입했는지
누가 선물했는지
꿈속의 우체통에서 꺼냈는지

나는 내일의 내가 이미 씌어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따라
살아갔다.
일을 했다.
드디어 외로워져서

밤마다 색인을 했다. 모든 명사들을 동사들을 부사들을 차례로 건너가서
늙어버린 당신을 만나고
오래되고 난해한 문장에 대해 긴 이야기를

우리가 이것들을 해독하지 못하는 이유는 영영
눈이 내리고 있기 때문
너무 많은 글자가 허공에 겹쳐 있기 때문

당신이 뜻하는 바가 무한히 늘어나는 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수만 명이 겹쳐 써서 새까만 표지 같은 것을 당신이라고
당신의 표정
당신의 농담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이상한 꿈을 지나서

페이지를 열 때마다 닫히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문장에서도 꺼내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당신은 토씨 하나 덧붙일 수 없도록 완성되었지만
눈 내리는 밤이란 목차가 없고
제목이 없고
결론은 사라진

나는 혼자 서가에 꽂혀 있었다. 누가 골목에 내놓았는지
꿈속의 우체통에 버렸는지
눈송이 하나가 내리다가 멈춘

한 문장에서

시집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2016) 수록

이 시의 제목은 ‘내 인생의 책’입니다. 오래전에 쓴 시라서 무슨 느낌으로 썼는지는 잊어버렸습니다. 쓰고 나면 잘 까먹고 잘 잊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내 인생의 책’이라는 제목이 떠올랐고, 내 인생을 그냥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그러고 보니 당신도 책이구나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을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은 ‘내 인생의 책’을 생각해 보았을 듯합니다. 누구에게는 성경처럼 압도적인 책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도스토옙스키 같은 고전소설일 것이고, 누구에게는 만화나 동화책일 수도 있겠습니다. 제게도 ‘내 인생의 책’들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고우영과 이향원의 만화들, 중고등학교 시절 문고본으로 읽었던 외국 소설들, 대학 시절 상비약처럼 들고 다녔던 시집들 등등. 나도 모르게 큰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한 번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지 않는 책도 있으니, 아마 국정교과서가 그럴 것 같습니다. 하긴 ‘내 인생의 책’을 쓴 저자가 정부기관이라면 창피해서라도 말하기 어렵겠습니다만.

당연한 말입니다만, 책을 많이 읽는 사회가 책에 무관심한 사회보다 좋은 사회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건 자명한 일입니다. 좋은 책을 만들고 좋은 책을 읽는 문화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 보면 회의감이 들 때가 많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은 책을 읽지 않은 사람보다 좋은 사람일까? 책을 읽으면 정말 지혜로워질까? 저로서는 의구심이 듭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도 ‘지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을 많이 보아온 탓입니다. 책을 읽으면 지혜로워진다는 말은, 나이가 들면 지혜로워진다는 말만큼이나 믿기 어렵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아니 실은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독선과 권력욕과 인정욕구가 강해진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심지어 책을 쓰기까지 했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자아도취에 빠지고 ‘지혜’로부터 멀어지고 타인에게 부당한 힘을 행사하는 사람들도 자주 보았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나이듦의 목적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생각될 때조차 있습니다.

역시 책 자체가 중요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세상에는 좋은 책도 많지만 상투적인 생각과 달콤한 위안을 적당히 섞어 놓은 책들도 널려 있습니다. 반성이 필요한 관습과 편견을 당연한 진리인 것처럼 유포하는 책들도 많습니다. 성역할과 위계질서와 사회관계에 대해 고정된 관념을 반복하는 시와 소설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고전들 역시 반드시 옳은 건 아닙니다. 그 시대의 지혜가 담겨 있기도 하지만, 그 시대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이 고전이기도 하니까요. 잘못하면 고전을 읽었다는 자족감 외에는 얻는 게 없을 수도 있습니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 보는 게 책 보는 것보다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책을 읽는 사람보다 트위터와 블로그를 보는 사람이 지금 이곳의 삶에 대해 더 지혜롭고 더 정의로울 가능성도 있습니다. 길고 평범한 책을 쓰는 일보다 트위터와 블로그에 자신만의 생각을 표현하는 일이 더 긴급하고 소중할 수 있습니다. 책은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한 마음의 양식일 수 있지만, 에스엔에스는 눈앞의 뜨거운 여름을 태우고 삶을 변화시키는 연료일 수 있습니다.

확실히 매체의 종류가 중요한 시대는 지난 듯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의 충족과 마음의 평화뿐 아니라, 끊임없는 생각의 어긋남, 질문, 갈등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질문, 갈등, 어긋남을 붙잡고 고민하는 것일 수 있겠습니다. 나와 다른 것을 접하고 나를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이는 겸허함은 일종의 용기이자 능력입니다. 그런 것은 책을 통해 얻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책에만 고유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당신과 하는 대화, 당신과 걷는 여행지의 풍경, 당신과 만나기 위해 움직이는 순간들이 모두 책을 읽는 일보다 소중합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인생은 책이 아닙니다. 우리 삶에는 제목도 없고 목차도 없고 결론 같은 것은 더더욱 없습니다. 묘비명이 우리 삶을 요약하지 못합니다. 정리하려고 할수록 뒤죽박죽이고, 막이 내리고 나면 아무도 없고, 엔딩은 뜻밖에도 빨리 와버리는 것, 그런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클라이맥스니 대단원이니 하는 것은 그저 자기 위안이거나 맥없는 비유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서로를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끊임없이 오독하고, 오해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어긋나고, 납득했다고 생각하면 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뜻하기 때문에 괴롭기도 합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꿈속에서조차 나는 당신을 해석하려 하고 서가의 책들처럼 배열하려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해석이나 배열은 내일이면 쉽게 엉망이 되겠지만, 그 엉망을 견뎌내고 바라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막막함과 싸우며 조금씩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나 자신을 바꾸고, 당신의 이면을 이해하고, 세상의 경계선을 조금씩 변경해 가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눈 내리는 풍경이 아름다운 것은 해석도 배열도 불가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 불가능을 감내하며 내리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이장욱 시인

※199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내 잠 속의 모래산> <정오의 희망곡> <생년월일> <영원이 아니라서 가능한> 등을 냈다.


눈 내리는 밤의 서가에서

모든 것은 눈이 내리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매순간 다른 형태와 풍경으로, 예측도 해석도 불가능하게, 정확한 재현은 어림도 없이, 영원히 일회적인, 돌이킬 수 없는 짧은 현존과 사라짐의 무한함으로.

내리는 눈 앞에서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 셀 수 없는 그러나 유한한 눈송이들이 만들어 내는 무한한 풍경에 대해, 저 많고 어지러우며 연약한 ‘있음’들이 무심히 받아들이며 투신하는 단 하나의 미래인 ‘없음’에 대해, 하얗고 차가운 ‘적막’에 대해, ‘나’라는 존재가 내리는 눈발 속에 섞여 있는 하나의 눈송이에 불과하다면 더더욱.

이장욱은 자신이 쓰는 모든 글의 운명이 ‘흩날리는 눈발’에 대한 사족이며, ‘눈 내리는 밤, 텅 빈 서가’에서의 알 수 없는 독백이라고 고백하거니와(그는 한때 ‘고백의 제왕’을 흠모한 적도 있으니), 그의 뒤를 따라 쓰는 이 미력한 해설(?)은 사족의 사족이며 모호한 주석에 대한 더 모호한 주석이 되기로 한다. 사실, 그 이상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읽고 쓰는 것과 살아가는 것. 활자들과 존재들. 문장들과 그 문장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삶과 세계의 모든 것. 이장욱은 ‘눈송이’의 비유를 통해 이 둘의 오랜 간극을, 지울 수 없는 거리를, 그것을 지우거나 지우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한없이 가깝게 만든다. 세계의 모든 각각의 것들과 그들의 불가해한 공존을 읽어내(지 못하)는 일이 곧 이장욱에게는 살아가는 일이며 시를 쓰는 일이다. 그는 자주 “무엇을 읽은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혀 있으며, “빈 의자”와 “밤하늘”과 “어긋나는 눈송이들”과 “먼 데서 잠든 네 꿈을” “읽은 것이 틀림없다”고 스스로를 위무한다.(‘밤의 독서’)

이장욱에게 시 쓰기는 타인과 자신에 어떤 질서나 해석도 덧입히지 않으려는 노력이며, 그 불가능한 발걸음이다. 점점의 활자들, 각각의 존재와 삶들, 흩날리는 눈송이들의 궤적을 다만 응시할 뿐인 그는 무해석의 주체로 남기를 원한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무해석의 말들이 어떤 해석보다도 명료하고 아름다운 역설. 모든 것은 눈이 내리기 때문이고, 우리들 각자가 하나의 눈송이이기 때문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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