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베르톨트 브레히트
나도 안다, 행복한 자만이
사랑받고 있음을. 그의 음성은
듣기 좋고, 그의 얼굴은 잘생겼다.
마당의 구부러진 나무가
토질이 나쁜 땅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은 으레 나무를
못생겼다 욕한다.
해협의 산뜻한 보트와 즐거운 돛단배들이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어부들의 찢겨진 어망이 눈에 띌 뿐이다.
왜 나는 자꾸
40대의 소작인 처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가는 것만 이야기하는가?
처녀들의 젖가슴은
예나 이제나 따스한데.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멸이
나의 가슴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두 번째의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김광규 역
언제 마지막 시집을 샀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십년 전일까 십오년 전일까. 시는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끔 읽는다. 지하철역에서. ‘읽는다’라기보다는 ‘보인다’가 맞겠다. 황지우 식으로 말하지면, ‘비인칭 주어로 우두커니 바라본다’가 더 정확하겠다. 나에게, 시는 죽었다. 더욱 불길한 것은 아마 앞으로도 살아날 것 같지 않다. 나는 시를 버렸고, 시는 나를 잊었다.
나에게도 문학소년인 때가 분명 있었다. 어린 마음에도 나에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진작 알았지만 나는 그의 집 주위를 배회했다. 그 소년은 김수영의 시집을 읽지 말았어야 했다. 아름다운 소녀를 위해 황동규의 시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는 정도로 그쳐야 했다. 국문학과를 간 것도 멍청하기 이를 데 없는 선택이다. 박노해의 시를 만나며 시인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렸다.
극작가이기도 한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읽게 되었을 때는 문학소년의 열정이 완전히 증발되었을 때다. 나트륨등의 불빛이 창문으로 배어들어오는 서울의 밤, 나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을 낮게 틀어 놓고 천천히 그의 시를 읽었다.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힘과 무지와 교활함이 정의를 희롱하고 욕보이던 시대, 정의라는 두 글자를 말하기 위해선 죽음과 맞바꾸는 용기가 필요한 시대, 그 어느 쪽도 내 것으로 할 수 없어서 소주병에 정신을 익사시키는 것만으로 하루를 연명하던 그때에.
그로부터 삼십년이 지났다. 그러나 내가 살고 있는 동네는 여전히 가진 자들의 적반하장(賊反荷杖)과 그에 기생하는 자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이 매 순간 리메이크되고 있을 뿐. 정의는 외인사(外因死)도 아닌 병사(病死)로 ‘처리’되고 있을 뿐.
나치를 피해 망명 6년차에 들어선 시인이 황량한 덴마크의 농가에서 이 시를 쓸 때 그는 절망적이었겠지만 결코 패배하진 않았다.
삼십년 전 나는 그 비루한 ‘살아남음’에 감동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겠다. ‘살아남음’에도 등급이 있음을. 그 ‘살아남음’ 자체가 우리가 잃어서는 안 될 것을 적극적으로 수호하는 것임을.
나는 그런대로 밥술 뜨는 집에서 태어나 그런대로 선망의 대상이 되는 학교를 나왔으며 그런대로 먹고살았다. 그래서 나는 사랑받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구부러져 못생긴 나무라는 손가락질도 받지 않았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존경했던 ‘민족의 지도자’가 ‘엉터리 작곡가’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비로소 ‘살아남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이 시는 낡았다. 내 아들은 이 시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십년 내내 말라비틀어진 채로 내 정신의 선산을 지킨 늙은 소나무와 같다.
시는 그런 것인가. 이렇게 끝끝내 살아남아 나를 심문하는가.
강헌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