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이주의 시인, 이제니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그 밤에 작은 유리병 속에 들어 있던 검은 것을 기억한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각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떠났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토록 다정한 것들은 이토록 쉽게 깨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물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것을 세월이라고 불렀다. 의식적인 부주의함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미련 속에서. 그 겨울 우리는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거슬러 갈 수 없는 시간만이 우리의 눈물을 단단하게 만든다. 아래로 아래로 길게 길게 자라나는 종유석처럼. 헤아릴 길 없는 피로 속에서. 이 낮은 곳의 부주의함을 본다. 노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웃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꽃이 만발한 세계였다. 빛이 난반사되는 어두움이었다. 너무 많은 리듬 속에서. 너무 많은 색깔 속에서. 너는 질식할 듯한 얼굴로. 어둠이 내려앉듯 가만히 앉아. 나무는 나무로 우거지고. 가지는 가지를 저주하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고. 은유도 없이 내용도 없이. 너는 빛과 그림자라고 썼다. 나는 물과 어두움이라고 썼다.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모든 문장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똑같은 낱말이 모두 다 다른 뜻을 지니듯이.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무수한 목소리를 잊고 잊은 목소리 위로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사랑받지 못하는 날들이 밤의 시를 쓰게 한다. 밤보다 가까이 나무가 있었다. 나무보다 가까이 내가 있었다. 나무보다 검은 잎을 매달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처럼.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밤이 밤으로 번지고 있었다.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수록
비상식과 비정상의 현실이 시를 찢다 현실이 문학을 찢고 들어와 활보하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이 텍스트 밖으로 도약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를 꿈꿔 온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한국문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용과 형식에 충격받았고, 일시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지금 문학은 현실보다 더 기이할 수 없으며, 비극적일 수도 없고, 심지어 코믹할 수조차 없다. 가히 그리고 정확히, ‘의문의 1패’다. 대한민국을 통째로 유린한 박근혜 게이트가 초래한 문학적(?) 사태다. 문학의 작동이 잠시 정지된 공간을 순식간에 평정한 것은, 비상한 창의력과 표현력으로 빛나는 국민의 창작물이다. 시굿선언, 공주전, 박공주헌정시, 시일야방성대곡, “내가 조선의 국모다”, ‘순실이 빨리와’ 게임 등이 생산되고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은 단 며칠 동안의 일이었다. 공동체의 목소리가 분출하는 역사의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 사유와 공공의 윤리, 살아있는 삶의 미학이 어떻게 폭발적으로 결합하고 성장하는지를 목도하게 한다. 이 대목에서, 기존의 문학과 예술 및 제도는 뜻하지 않게 한 번 더 찢긴다. 그런데 박근혜 게이트가 초래한 문학적 사태는 문학의 작동 정지에만 있지는 않다. 같은 현상의 이면에서, 이 기이한 게이트는 문학작품에 현실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를 덧씌우는 일을 하고 있다. 오직 현실에 직핍하는 정치적 의미에서만 문학이 작동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당분간 시는 무력하여 읽히지 않거나, 정치적 알레고리의 개입 없이는 읽을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우리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작고 검은 상자’). 현실에 찢겨 피 흘릴 시의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2014년의 이제니는 이렇게 썼다. 또 이렇게 ‘예언’하기도 했다. “사람은 우는 것 사랑은 하는 것//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얼굴은 보는 것’). 시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돌파하며 나아가는 힘이 있고, 시인은 그 일을 현실로 만든다.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끝을 ‘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작’이 시작될 수 있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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