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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말들

등록 2016-11-04 19:28수정 2016-11-04 20:40

[토요판] 이주의 시인, 이제니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그 밤에 작은 유리병 속에 들어 있던 검은 것을 기억한다. 결국 우리는 그것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각자 자기가 있던 곳으로 떠났다.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한 번도 만나지 않았던 것처럼. 그토록 다정한 것들은 이토록 쉽게 깨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눈물이라고 불렀다. 누군가는 그것을 세월이라고 불렀다. 의식적인 부주의함 속에서. 되돌릴 수 없는 미련 속에서. 그 겨울 우리는 낮은 곳으로 떨어졌다. 거슬러 갈 수 없는 시간만이 우리의 눈물을 단단하게 만든다. 아래로 아래로 길게 길게 자라나는 종유석처럼. 헤아릴 길 없는 피로 속에서. 이 낮은 곳의 부주의함을 본다. 노래하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웃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군요. 꽃이 만발한 세계였다. 빛이 난반사되는 어두움이었다. 너무 많은 리듬 속에서. 너무 많은 색깔 속에서. 너는 질식할 듯한 얼굴로. 어둠이 내려앉듯 가만히 앉아. 나무는 나무로 우거지고. 가지는 가지를 저주하고. 우리와 우리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거리와 거리 사이에는 오해가 있고. 은유도 없이 내용도 없이. 너는 빛과 그림자라고 썼다. 나는 물과 어두움이라고 썼다.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모든 문장은 모두 똑같은 의미를 지닌다. 똑같은 낱말이 모두 다 다른 뜻을 지니듯이. 우리가 우리의 그림자로부터 떠나갈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된다. 무수한 목소리를 잊고 잊은 목소리 위로 또 다른 목소리를 불러들인다. 사랑받지 못하는 날들이 밤의 시를 쓰게 한다. 밤보다 가까이 나무가 있었다. 나무보다 가까이 내가 있었다. 나무보다 검은 잎을 매달고.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사람처럼. 영원히 사라질 것처럼. 밤이 밤으로 번지고 있었다.

시집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에 수록

사랑은 어떻게 다가오는가. 사랑은 어떻게 사라지는가. 어떤 말이 있다. 단단하게 굳은 말이 아니라 투명하게 비춰주는 말. 말하지 않은 말까지 드러내는 말.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가만히 보듬어주는 말. 돌이었던 말이 유리로 변모해갈 때, 그렇게 존재의 어둠을 걷어내고 서로의 맨얼굴을 드러낼 때, 너와 나는 둘만의 은밀한 세계로 들어선다. 중요한 단 한마디의 말은 아껴두면서. 그 아껴두고 감추어둔 말 속에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둘만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믿으면서.

그러나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으리라는 믿음의, 아니 그 믿음을 담보하고 있는 그 언어의 허약한 속성으로 인해, 시간과 감정의 어긋남과 엇갈림 속에서 말하지 않은 말들과 말하지 못한 말들이 쌓여갈 때, 영원히 영롱하게 반짝일 줄 알았던 가슴속의 유리구슬은 어둡고 무거운 돌이 되어간다. 유리였던 말이 돌이 되어버린 연유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해주고 받아주던 마음이 이제는 그 어떤 말로도 설득되지 않는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아니, 그런 사정으로 인해,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 어느 결에 숨겨왔고 참아왔던 말들이 결국은 너와 나를 파국으로 치닫게 한 그 모든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가닿지 못하는 말들 앞에 서서, 무력한 마음으로 나약한 말의 자리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지나간 사랑에 대한 예의로 우리는 어떤 말들을 목구멍 속으로 삼킨다. 우리는 어떤 말을 내뱉는 대신 그저 그것을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하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간다. 말하지 않은 마음을 투명한 유리병 속에 넣어두는 것은 언제고 언제든 어떤 마음의 진심을 뒤늦게나마 알아봐주기를 바라는 아주 작은 기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은밀한 한 세계가 무너져 내려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답다. 노래하는 사람도 웃고 있는 사람도 여전히 너무나 많다. 찢어질 듯한 마음과는 무관하게, 이 세계는 존재의 본성 그대로 순간순간 아름답게 존재하면서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이 세계에 대해 좋다 나쁘다 이러하다 저러하다 말하는 것은 흔들리기 쉽고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허상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나무는 그저 본연의 성질 그대로 태어나 자라나고 죽고 썩는다. 썩어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다시 한 그루의 나무로 자라난다. 다시 태어난 나무가 비록 이전의 나무는 아닐지라도. 나무는 또 다른 나무로 자라나면서 이전의 나무를 복원한다. 죽은 나무의 자리에서 돋아난 씨앗 속에 이전에 죽어 스러진 나무의 기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역시도 사라져간 이전의 기억을 통해, 그렇게 모르는 사이에 덧씌워진 그림자를 떠나옴으로써, 존재의 본성에 가까워진다. 아픔 없이 슬픔 없이 온전한 한 사람이 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인간은 어리석고, 마음은 헤아릴 길 없으며, 마음을 전하는 언어의 밀도는 터무니없이 희박하다. 그러는 동안에 하나의 몸에는 지나간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수한 목소리들이 새겨진다. 말할 수 없었던 말들. 말해서는 안 되는 말들. 말로 할 수 없는 말들. 말이 될 수 없는 말들. 무수한 말들을 딛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는 너와 나 사이로 무언가가 내려앉는다. 검은 것 속의 검은 것. 검은 것 사이의 검은 것. 굳게 닫은 입속에 말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품고 있을 때 우리가 배우는 것은 침묵으로 감당하고 있는 어떤 장소의 영속성이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자만이 사랑의 빛과 어둠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그러나 그 장소는 밤처럼 어둡고 어두워서. 어둠의 너머에는 말 없는 나무들만이 줄지어 서 있을 뿐으로. 줄지어 서 있는 보이지 않는 나무를 바라보며 유리병 속에 남겨져 있는 검은 것을 생각할 때. 결국 간신히 말해볼 수 있는 것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그렇게 말하지 못하는 어떤 말들이, 사랑받지 못하는 어떤 마음이, 밤의 시를 불러들인다. 말하지 못하는 그것을 종이에 쓰면서 조금씩 조금씩 시에 가까워진다. 시에 가까워지면서 말없이 죽어간다.

이제니 시인

*200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아마도 아프리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등의 시집을 냈다. 편운문학상 우수상과 김현문학패 등을 받았다.


비상식과 비정상의 현실이 시를 찢다

현실이 문학을 찢고 들어와 활보하고 있다. 현실을 반영한 문학이 텍스트 밖으로 도약해 현실을 변화시키기를 꿈꿔 온 것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한국문학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내용과 형식에 충격받았고, 일시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다. 지금 문학은 현실보다 더 기이할 수 없으며, 비극적일 수도 없고, 심지어 코믹할 수조차 없다. 가히 그리고 정확히, ‘의문의 1패’다. 대한민국을 통째로 유린한 박근혜 게이트가 초래한 문학적(?) 사태다.

문학의 작동이 잠시 정지된 공간을 순식간에 평정한 것은, 비상한 창의력과 표현력으로 빛나는 국민의 창작물이다. 시굿선언, 공주전, 박공주헌정시, 시일야방성대곡, “내가 조선의 국모다”, ‘순실이 빨리와’ 게임 등이 생산되고 전국적으로 유통된 것은 단 며칠 동안의 일이었다. 공동체의 목소리가 분출하는 역사의 현장은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 사유와 공공의 윤리, 살아있는 삶의 미학이 어떻게 폭발적으로 결합하고 성장하는지를 목도하게 한다. 이 대목에서, 기존의 문학과 예술 및 제도는 뜻하지 않게 한 번 더 찢긴다.

그런데 박근혜 게이트가 초래한 문학적 사태는 문학의 작동 정지에만 있지는 않다. 같은 현상의 이면에서, 이 기이한 게이트는 문학작품에 현실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를 덧씌우는 일을 하고 있다. 오직 현실에 직핍하는 정치적 의미에서만 문학이 작동하도록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당분간 시는 무력하여 읽히지 않거나, 정치적 알레고리의 개입 없이는 읽을 수 없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우리로 존재하지 않았다”, “너는 우리에게 하지 않은 말이 있다”(‘작고 검은 상자’). 현실에 찢겨 피 흘릴 시의 미래를 알지 못했지만, 2014년의 이제니는 이렇게 썼다. 또 이렇게 ‘예언’하기도 했다. “사람은 우는 것 사랑은 하는 것// 우리는 우리라는 이름을 얻는 대신/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얼굴은 보는 것’). 시에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돌파하며 나아가는 힘이 있고, 시인은 그 일을 현실로 만든다. 그곳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끝을 ‘끝’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시작’이 시작될 수 있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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