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정갈한 책에 반하고 책값 인심에 또한번 반하고

등록 2005-11-03 20:14수정 2006-02-06 20:54


헌책방 순례/신림 현대서점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가방을 멘 아주머니가 과목별로 중학교 참고서를 골랐다. 예순쯤 되었을까. 아무리 늦둥이어도 자녀를 위한 책이 아닌 듯했다. 알고 보니 2년제 수도중학교를 다니는 쉰여섯의 ‘늙은 중학생’이었다. 그한테서 새로움에 눈뜨는 이의 행복감이 전염돼왔다. 여기저기서 책을 뽑는 신림 현대서점(02-877-7561) 주인 하종길(60)씨의 표정이 밝았다. 오랫만에 동지를 만난 듯했다. 낙서가 가장 적고, 표지가 깨끗한 것으로 골라서 봉투에 담아 건넸다.

관악구 신림6동 시장 앞에 자리잡은 이 책방은 여덟 평. 5년 전만 해도 몇미터 떨어진 길가의 두 평 공간이었다. 20여년 동안 그 좁은 데서 먹고 살았고 딸 넷을 키워냈다. 늙은 중학생의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라는 말은 그가 오기 전 주인 하씨가 던진 몇마디 말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이었다. 얼굴 가득 주름은 세월의 흘러간 자취라기보다 웃음이 인박힌 상호일 터다. 말수가 적은 터, 안주인 홍양순(54)씨가 거들었다.

“당최 욕심이 없어요. 셋방 살 때 큰 소리 못하고 살았는데, 지금은 뜨신 물 나오는 내 집에서 사니 얼마나 행복하냐는 거예요. 옛날 남산에서 신문 깔고 자던 얘기까지 하면서 말이에요. 책 욕심은 말도 못해요.”

소 풀 뜯기면서 책 읽는 모습에 반해서 결혼했다는 같은 마을 출신 홍씨는 결혼해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했다. 혼례 직후 상경하여 헌책방을 하고 보니 하는 일이 무척이나 궂었다. 낮에는 책을 모아들이고 밤에는 둘이서 닦고, 붙이고, 다렸다. 물 먹은 것은 일일이 신문지를 끼우고 눌러 살려냈다. 손님들한테 듣는 ‘책이 깨끗하다’는 한마디 말은 부부의 긴 밤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운데 책꽂이 2개. 좌우벽 겹책꽂이. 바닥이 윤기가 자르르하고 책의 정갈하기가 새책방 같다. <위험한 식탁> <정도전을 위한 변명> <한국의 단청>이 눈에 띄고 얼마전 타계한 정운영 선생의 <노동가치이론 연구>도 보였다. 통로에 책이 쌓여 한사람이 퍼질러 책을 고르면 뒷사람은 다른 통로로 가야 한다. 한 단골은 쌓인 책 가운데 좋은 책이 많다고 귀띔했다. “책이 깨끗한 것 외에 다른 책방보다 값이 싸다는 게 장점이에요.” 눈 밝은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대박’을 건졌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심심찮게 올라온다. 고서가 나오기는 하는데 잘 몰라서 자주 오는 젊은 단골한테 싸게 판다고 했다. 그 친구, 아마 꽤 좋은 책을 많이 구했을 거라고 남의 말하듯 말했다. 그의 책 욕심은 책 구하기. 예전에는 주변 고물상을 돌면 책을 두세 상자 구했는데 요즘은 한상자 건질똥말똥이다. 그래도 하루 두어 차례 고정적 순례를 그만 둘 수 없다. 구해온 책 가운데 손님들이 좋은 책이라며 뽑아들면 그게 자신의 실력인 양 기분이 좋다. 그는 책값 매기는 데는 욕심을 안 부린다. 그래서 안주인은 늘 불만이다.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새 들은 유일한 바깥양반 흉이다.


책방은 버스 정류장에서 가깝되 숨은 것처럼 틀어앉았고 시장 입구이긴 한데 쏙 들어간 골목에 있어 행인한테는 눈에 띄지 않는다. 시장을 보고 난 주부들, 아이와 손잡고 온 아버지 등 동네사람과, 사랑방처럼 늘 찾아오는 단골들이 이용할 뿐. 그래서일까, 돈과 책을 교환하는 데라기보다 정을 나누는 공간처럼 아늑하다.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