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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혼자가 아니기 위하여

등록 2016-11-18 19:41수정 2016-11-18 20:10

[토요판] 유진목, 나의 시를 말한다
잠복

그 방에 오래 있다 왔다 거기서 목침을 베고 누운 남자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는 우는 것 같았고 그저 숨을 쉬는 건지도 몰랐다

부엌에 나가 금방 무친 나물과 함께 상을 들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방에 있자니 오래된 아내처럼 굴고 싶어진 것이다 일으켜 밥을 먹이고 상을 물리고 나란히 누워 각자 먼 곳으로 갔다가 같은 이부자리에서 깨어나는 일

비가 온다 여보

당신도 이제 늙을 텐데 아직도 이렇게나 등이 아름답네요

검고 습한 두 개의 겨드랑이

이건 당신의 뼈

그리고 이건 당신의 고환

기록할 것이 많았던 연필처럼
여기는 매끄럽고 뭉둑한 끝

어떻게 적을까요

이불 한 채
방 한 칸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을

시집 <연애의 책> 수록

나는 오랫동안 혼자서 살았다. 십오 년은 되지 싶다. 사람들은 나와 만나면 혼자 사는 것에 대해 말하곤 했다. 대개는 지쳐 있고 책임이 무거울 때 그랬다. 너는 혼자 살아서 좋겠다. 나는 혼자 좀 있고 싶어. 그렇게 혼자가 아닌 삶의 괴로움이 이어졌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어서 다행인 것들과 좋은 것들, 편리한 것들도 사이에 스며들었다. 남편이 있는 사람. 남편의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 아내가 있는 사람. 아내의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 아이가 어려 한시도 혼자 둘 수 없는 사람. 동생을 돌보는 사람. 아버지가 싫지만 떠날 수 없는 사람. 어머니와 자주 싸우는 사람. 너는 내 맘을 모를 거야. 나는 속으로만 말했다. 그러게. 나는 혼자만 있어도 힘이 들 때가 많은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늘 집에 혼자 있다. 기억이 간단히 그렇게 생활을 다듬어버렸다. 다른 순간들을 찾으려면 애를 좀 써야 한다.

열아홉 살에는 고시원에서 학교를 다녔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하숙에서 원룸으로, 해마다 거처를 옮겼다. 처음에 얻은 원룸은 화장실이 복도에 있었다. 그다음에는 빌라 동 전체가 방을 하나씩 나눠 사용하는 곳에 살았다. 부엌과 욕실을 함께 쓰는 것이다. 현관문에 종종 메모가 붙어 있었다. 냉장고에 김치 안 드시면 치워주세요. 냄새가 납니다. 샴푸 빈 통은 누구 건가요? 버리세요. 직장을 다니면서 방이 두 개인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방이 두 개이고 부엌이 따로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대단히 부자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감당하던 것보다 월세를 훨씬 많이 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이사를 해서 얼마 동안은 괜히 작은 방에 가서 문을 열고 들여다보곤 했다. 나 혼자 쓰면 되는 세탁기도 샀고, 내 취향에 맞는 옷장도 샀고, 오래 두고 먹을 음식도 넉넉히 넣어둘 수 있는 냉장고도 샀다. 그 후로 나의 생활은 더 나빠질 것도 더 나아질 것도 없이 오래 유지되었다. 더 나빠지지야 않겠지만 더 나아진 생활이란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퇴근 후에는 부엌에서 저녁을 만들어 먹고 설거지를 하고 조용히 잠이 들었다.

하루는 어쩐 일인지 비가 오는 툇마루에서 깨어났다. 잘 닦여 반들반들한 나무 바닥이 축축한 공기를 머금어 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코끝에 비 냄새가 훅 끼쳤다. 마당에는 내가 잘 아는 나무 한 그루가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맨살로 누워 있기에 좋은 날씨였다. 여기가 나의 집이라니, 나는 그대로 영영 살고 싶었다. 거기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내 쪽으로 등을 지고 있어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맨등이 천천히 올랐다가 다시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걸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했다. 그 리듬에 맞춰 숨을 쉬다 보니 금방이라도 다시 잠이 들 것 같았다. 이제 다시 깨어나면 영영 못 볼 사람인데. 손을 뻗어 등을 만지려다가 그만두었다. 얕게 오르내리는 맨살의 등 너머로 조용히 지치지 않고 비가 내렸다. 거기서는 아무것도 지칠 줄 몰랐다.

그날 나는 끝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저쪽에서 이쪽의 삶으로 돌아왔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글쎄, 천장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돌아가고 싶어 눈을 질끈 감아도 이미 저쪽의 세계는 사라진 뒤였다. 나는 이부자리에서 나와 겨우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정류장을 지나칠 뻔하고서 허둥지둥 버스에서 내렸다. 회사에서는 내내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내가 집이라 여겼던 아름다운 툇마루. 점심에는 입맛이 없어 동료들에게 밥을 거른다 하고 산책을 했다. 일어나 부엌에 가면 금방이고 맛있는 밥을 지을 수 있었던 툇마루. 나는 거기서 평소보다 훨씬 밥을 수북이 공기에 담았다. 갓 지은 쌀밥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더랬다. 저녁에는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본 그날의 일을 적었다. 그러고 나니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다음날부터는 밥도 잘 먹고 일도 집중해서 잘했다. ‘잠복’은 나의 집이 분명했으나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곳에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와 하루를 보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곳에 다녀온 후로 나는 질문이 많아졌다. 나의 삶에 없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내가 가지기로 결정한 것일까. 이건 가지고 싶지 않았는데 왜 버릴 수가 없는 걸까. 왜 아무리 버려도 나에게 돌아오는 걸까. 저건 왜 가질 수가 없는 걸까. 가진 줄 알았는데 언제 잃어버린 걸까. 그건 그런대로 할 수 있었는데 왜 이건 아무래도 할 수가 없는 걸까. 나를 가둔 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나는 어디에 도착하게 될까. 나는 왜 할 말을 생각하느라 순간을 놓치는 걸까. 나는 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순간에 머무는 걸까. 나는 왜 사람을 무서워할까. 그때 나는 왜 죽으려고 했을까. 절대로 잊을 수 없다고 하고서 왜 기억하지 못할까. 나는 왜 용서하지 않기로 했을까. 나는 왜 상처를 받을까. 나는 왜 상처를 줄까. 나는 왜 더 많이 사랑할까. 나는 왜 자주 행복할까. 나는 왜 시를 쓸까.

유진목 시인
유진목 시인
나는 질문이 많은 채로 사는 게 무서워서 시를 쓴다. 안전하다는 기분을 가지려고. 혼자서 잘 있으려고 시를 쓴다. 그리하여 당신에게 내 마음을 모른다고 말하지 않기 위하여 시를 쓴다. 언젠가 당신이 나를 읽는다면. 고개를 끄덕인다면. 나는 혼자가 아니기 위하여 시를 쓴다.

유진목 시인

*2016년 <연애의 책>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와 <연애의 책>이 있다. ‘목년사’에서 영화를 만들고, 글을 쓴다.


연애의 궁극, 불굴의 연애

“매일같이 당신을 중얼거립니다 나와 당신이 하나의 문장이었으면 나는 당신과 하나의 문장에서 살고 싶습니다”(‘당신,이라는 문장’). “언제는 살아가는 일이 싫다가도 또 언제는 살아봐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내가 마치 죽은 사람 같아서 웃음이 납니다 (…) 모든 일이 잘 되리라는 믿음은 없습니다 다만 계속해서 살아가보려고 합니다”(‘반송’).

시의 해설이 해설하려는 그 시만으로 이루어져도 좋은 시. 시의 해석을 최대한 늦추고, 단어와 문장과 리듬을 읽는 데 몰두해야 하는 시. 시를 읽는 일이 곧 살아 있는 일이 되도록 종용하는 시. 시가 읽는 이에게 ‘삶’이라는 행간을 품고 저마다의 이야기로 다시 시작되는 시.

비평의 꿈은 작품만 남기고 비평이 소멸하는 것이며, 시 읽기의 궁극은 읽는 이가 행복하게 사라지며 새로 탄생하는 것에 있다. 유진목의 시는 이 꿈과 궁극의 근처로 우리를 데려간다. 올해 시집 <연애의 책>(삼인)으로 등단했고, 이에 앞서 언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문학과죄송사)를 낸 유진목의 시에 ‘진짜’, ‘최고’ 등의 최상급 수식어가 붙는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연애란 무엇인가. 사랑을 나누는 행위이며 사건이다. 삶의 일부이지만, 삶의 전부를 설명하는 특이점이기도 하다. 유진목의 ‘연애시’는 ‘시’의 제유이자 동의어로, 사랑 아닌 것들이 사랑을 잠식하고 삶이 아닌 것들이 삶을 지배하는 세계에서, 다만 계속해서 살아가기 위해 쓰인다. 유진목은 세계답지 못한 이 세계의 불능에 연애의 능력을 맞세운다. 논리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유진목에게 연애란 사랑을 무너뜨리는 것들로 사랑을 빚고, 희망 없는 미래를 위해 희망에 의존하지 않는 ‘나’를 세움으로써 “갈수록 나빠져도 힘을 다해 살아”(‘악력’)가는 팽팽한 노력이다. 그녀의 연애는 보상을 모르고, “갓 지은 창문에 김이 서리도록 사랑하는 일”과 “혼자서 잘 있는 일”을 두 축으로 삼는다. 삶은 ‘아님’과 ‘없음’의 에너지로 가동하는 불굴의 연애라는 것. 유진목이 공개하는 연애의 비법, 삶의 비법은 오래된 향을 품고도 이토록 새롭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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