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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물 한 방울

등록 2016-11-18 19:41수정 2016-11-18 19:59

[토요판] 김숨의 시
물 한 모금  셰이머스 히니·김정환 옮김

그녀는 매일 아침 물 길러 왔다
늙은 박쥐처럼 비틀거리며 들판 위로:
펌프의 고함 기침 소리, 양동이 딸그락거리다
물이 차면서 잦아드는 소리가,
알렸다 그녀를, 생각난다
그녀의 회색 앞치마, 얽은 하얀 에나멜,
넘치려는 양동이의, 그리고 고음역
키익키익, 펌프 손잡이 같은 그녀 목소리의,
만월이 그녀 박공지붕 위로 들리는 밤마다
만월은 다시 떨어졌다 그녀 창문을 통해 그리고 눕히곤 했다
제 몸을 탁자에 마련된 물속으로,
그곳에서 나는 살짝 잠겨 다시 마셨다, 그리고
충실히 따랐다 그녀 잔에 새겨진 가르침,
주신 그분을 기억하라 입술 벗어나면 희미해지고.

오늘도 소녀는 물을 길으러 겨자색 플라스틱 통을 손에 들고 집을 나선다. 소녀는 7월의 사루비아(샐비어) 꽃처럼 붉게 불타는 천을 까만 몸에 두르고, 쥐포처럼 납작한 슬리퍼를 신었다. 연못까지 소녀는 꼬박 다섯 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열병을 앓는 혀처럼 뜨거운 땅 위에는, 짐승의 가녀린 뼈가 널려 있기도 하다. 소녀는 ‘매일’ 물을 길으러 연못까지 다섯 시간을 걸어간다. 소녀는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 학교에 다니고 싶지만 가족들이 마실 물을 길어 와야 하기 때문에 그럴 수 없다. 집에는 소녀 말고 물을 길어 올 사람이 없다. 마침내 다다른 연못에서 소녀는 자신처럼 물을 길으러 온 소녀들을 만난다. 웅덩이에 불과한 곳에 옹색하게 고인 물은 누런 흙탕물이다. 소녀는 제 얼굴을 씻기에도 더러운 물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수면에 이마가 닿도록 엎드린다. 기도하듯 눈을 감고 입을 벌려 ‘한 모금’ ‘한 모금’ 물을 마신다. 어느새 소녀는 흙탕물을 그득 담아 무거워진 통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향한다. 소녀는 다시 꼬박 다섯 시간을 걸어가야 한다. 소녀가 길어 온 물을 마시고 어머니와 동생들은 설사를 한다. 물을 길으러 다니는 케냐의 소녀들 이야기를 소설적으로 간략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소녀는 극심한 물 고갈로 ‘마실 물’이 없어 고통받는 30억명 중에 하나다. 세계적으로 여자와 아이들이 마실 물을 구하기 위해 들이는 시간은 매일 2억 시간에 달하고, 매일 5살 미만 어린이 800명이 오염된 물을 먹고 죽는다.

어릴 때 시골에 살았던 나는 마당에 펌프가 들어오고, 몇 해 뒤 그 자리에 수도꼭지가 놓이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도시로 나와 살았던 변두리 동네에는 우물이 있었다. 널빤지로 덮여 있는 우물 근처를 지날 때마다 얼마나 깊은지, 얼마만큼의 물이 고여 있는지 궁금했지만 널빤지를 들추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귀기마저 감돌았지만 마을 여자들이 그 우물을 찾아와 두레박을 던져 길어 올린 물로 푸성귀를 씻고, 머리를 감고, 아이의 얼굴을 씻기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낯선 마을에서 우물이나 그 터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누가 저곳에 우물을 팠을까. 애초부터 우물이 그곳에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 물길을 찾아 땅을 팠을 것이고, 물이 점점 차올라 우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 누군가에게는 쉽게 주어진 것이 어째서 내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동전을 뒤집듯 그 질문을 뒤집어본다. 내게는 쉽게 주어진 것이 어째서 다른 누군가에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 것인가. 소녀가 물을 길으러 연못까지 걸어가는 동안 내 손가락들 사이로 무심하게 흘러갔을 수십, 혹은 수백 억만 개의 물방울들을 생각한다.

보이저호가 행성들을 지나가면서 채록한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행성들은 독특하고 특별한 자신들만의 소리를 품고 있었다. 완두콩만 한 물방울마다에도 저마다의 오묘한 소리가 반복 변주되면서 발생하고 소멸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단지 문명화된 인간의 아둔하고 이기적인 귀가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일 뿐.

한 방울의 물 앞에서 스스로 겸손해지는 자, 그에게 복이 있으리라, 복이 있으리라…. 저절로 중얼거려지는 밤이다.

김숨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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