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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가벼운 영혼들은 가여운 영혼들이었다

등록 2016-11-25 19:32수정 2016-11-25 20:09

[토요판] 송태웅, 나의 시를 말한다
폭설에도 내 집 무너지지 않았다

폭설에 내 집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바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온 천지 흰 눈이 내린 곳마다 작은 집들은 힘없이 무너져내렸습니다만 백두대간 금강송으로 세운 내 집 그 고대광실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이 폭설에도 앙버티는 내 집은 은성하던 시절을 수십 년을 지나와서도 여전히 그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여가수 같았습니다 가벼운 영혼들은 대개 가여운 영혼들이었습니다 나의 집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영혼들에게 얻어맞고 무너져야 했습니다 그때서야 나도 가까운 호수에 쳐놓은 그물을 걷으러 황야에 설 수 있을 테니까요

시집 <파랑 또는 파란>(도서출판 b) 수록

2012년 1월, 나는 강정 해군기지 반대 작가 릴레이 걷기 행사에 광주에서 목포까지의 구간을 맡아 걷게 되었다. 3박4일 만에 목포에 도달하여 이제 반나절만 더 걸으면 나의 임무는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누구의 뜻이었을까. 과속하는 트럭에 추돌되어 전복되면서 방호벽을 받고 튕겨져 나온 승용차에 등 뒤를 받혀 갈비뼈 3개가 부러지고 말았다. 광주의 한 병원에서 한 달간 입원해 있다가 퇴원하여 짐을 싸들고 지리산 피아골의 한 민박집을 얻어 머무르게 되었다. 서울 노량진, 광주 등을 떠돌며 학원 강사일을 하던 나의 생업은 거기까지였다. 피아골에 짐을 푼 나는 마치 피란민 같은 복장을 하고서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의 피아골을 서성거렸다.

나는 민박집의 2층에 묵게 되었는데 1층에 나랑 행동거지가 비슷한 60대 초반의 사내가 미리 와 살고 있었다. 그는 젊었을 적 회사를 경영했다고 했는데 백명의 직원을 고용하고, 천억의 돈을 벌었으며, 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언젠가 내다본 그의 방에는 오쇼 라즈니쉬가 쓴 <달마>라는 책이 달랑 한 권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내게 십만원만 빌려달래서 빌려주었더니 그 돈으로 내게 막걸리를 샀다.

그와 같이 산행을 하고 막걸리를 마시니 그 깊은 산속에서 홀아비 둘이 친해지게 되었다. 그날도 막걸리를 마시며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군경에 의해 애꿎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말을 내가 했다. 그가 정색으로 화를 내며 나의 국적을 물어왔다. 남이냐, 북이냐를 확실히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화를 참지 못하고 막걸리잔을 내던지며 그의 말에 격하게 항의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그도 레드콤플렉스에서 한 걸음도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동안 그를 만나지 않았다. 같은 집의 일이 층에 살면서도 서로의 동선을 피해 다닌 것이다. 나는 도시에 사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몇날며칠간의 떠들썩한 술판을 벌이면서도 그에게 소주 한 병 가져다주지 않았다.

생강나무꽃이 피었다 지고 산수유꽃이 필 무렵 그와 나는 막걸리잔을 앞에 두고 서로 화해했다. 둘 다 산중생활의 외로움과 고립감을 견뎌내기 힘들었던 것이었다. 얼마 후 마산으로 돈을 벌러 간다고 갔던 그가 열흘 만에 돌아왔다. 돈은 벌지 못하고 병만 얻어 돌아온 것이다. 그의 몸피는 반으로 줄어 있었다.

나의 시는, 내가 산중에서 만난 그와 같은 사람들에게 초점이 맞춰졌다. 하기는 나 자신도 그와 같은 사람들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가벼운 영혼들은 대개 가여운 영혼들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집을 나왔고,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고를 당했으며, 미래에 대한 아무런 희망도 없는 사람과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삶의 새로운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도시로 나갈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더 높은 산정까지 오르며 숲의 정령을 만나려 했으며, 언제부터였는지 이 산속에 들어와 삶의 터전을 닦고 대대로 살아온 무지렁이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보려 했다. 일체의 사전 지식이나 인과론에 입각한 예측을 배제하고 지리산과 나와 사람들의 민낯을 쓰고 싶었다. 그래야만 이 산에 스치는 절망적인 외로움과 치유 불능의 상처 그리고 다가오는 두려움이나 화해와 평화의 가능성을 내 시에 담아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물론 고대광실에서 살지 않는다. 아니, 한 채의 초려삼간도 갖고 있지 못하다. “백두대간 금강송으로 세운 내 집 그 고대광실”은 내가 혹시 갖고 있을지 모를 기득권이자 정신의 사치이며 허세일 뿐이다. 폭설에 힘없이 무너지는 작은 집들은 “가벼운 영혼들”과 “가여운 영혼들”이 깃들여 사는 집들이다. 그들이야말로 오천 년 우리 역사의 실제적 주인공들이었고 우리 땅의 빛나는 보석들 아니겠는가. 가난하면서도 순정한 영혼들이 있었기에 역사의 탁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에 의해 끊임없이 청정한 물줄기를 공급받아 더는 썩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제 나이보다 열 살은 더 먹은 듯한 얼굴들, 허름한 입성에 험난한 삶의 경험과 지혜로 번뜩이는 토박이 말투… 아, 나도 그렇게 살기를 마음먹게 되었다. 그러려면 나의 고대광실도 가여운 영혼들에게 얻어맞고 가차없이 무너져야 했다. “그때서야 나도 가까운 호수에 쳐놓은 그물을 걷으러 황야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은성하던 시절을 수십 년이나 지나서도 여전히 그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여가수” 같아서는 안 되었다. 오십을 절반이나 넘긴 나의 머리에도 희끗희끗 서리가 내려야 할 것이며,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장터에 나가 선술집 구석에 한자리 차지하고서 누렇게 웃는 얼굴들과 막걸리 한잔 들이켜고 와야 할 것이다.

송태웅 시인


‘나’는 가볍고 가여운 영혼들을 위해 무너진다

세상의 폭설에도 내 집은 무너지지 않았노라고 송태웅은 노래한다. “백두대간 금강송으로 세운 내 집 그 고대광실은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막걸리 한잔에 달뜬 육자배기 가락 같기도 하고, 정해진 악보의 규칙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무조(無調) 음악 같기도 하다. 세상의 폭설에도 무너지지 않고 오롯이 건재하는 ‘내 집’이란,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쌓아온 모든 것을 말한다. 자아, 내면, 자기 세계, 가치와 신념, 삶의 방식, 삶의 결실 등.

그런데 정말 송태웅의 집은 금강송으로 지은 고대광실이며, 눈 내린 곳마다 작은 집들이 와르르 무너져도 끄떡없는 안전가옥인 걸까. 우리는 그의 진술을 믿지만 다 믿을 수는 없다. 이 믿음과 믿을 수 없음의 중첩에 송태웅의 시가 자아내는 뼈저린 울림이 있고, 우리들 각자의 작고 가벼운 삶에 대한 쓰디쓴 통증이 있다. 내 마음이 지은 크고 근사한 집이 세상의 폭설 앞에 얼마나 왜소하고 부실했는지 우리는 모두 겪은 일이 있으므로.

“폭설에 내 집 무너지지 않을까 싶어 바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조바심은 안도감으로 바뀌지만, 이 튼튼한 집은 결국 무너진다. “나의 집도 이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영혼들에게 얻어맞고 무너져야 했습니다”. 폭설에도 건재한 ‘내 집’은, 폭설에 무너진 “작은 집”들의 주인인 가여운 영혼들에 의해 무너진다. ‘내 집’을 무너뜨리는 것은 세상의 거대한 힘이 아닌, 가볍고 가여운 영혼들이다. 더 정확히는, 가여운 영혼들 앞에 스스로 주저앉는 내 영혼이다. ‘나’ 역시 가볍고 가여운 영혼이므로.

세상의 모든 집은 무너진다. 어떻게, 무엇을 위해 무너지는가가 문제일 뿐이다. ‘내’가 ‘나’를 쌓아올려 만든 ‘내 집’은, 짓는 것 못지않게 무너뜨리는 것이 중요하다. 송태웅은 고대광실로 설계한 ‘내 집’을 무너뜨리는 주권을 세상의 권세가 아닌, 가벼운 영혼들에게 준다. ‘나’는 세상의 가벼운 영혼들 앞에서만 무너진다. 무너진 자리에는 ‘황야’가 펼쳐지고, ‘나’는 길을 떠난다. 세상의 모든 가볍고 가여운 영혼들이 떠도는 황야가 이제부터 ‘나’의 길이고 ‘나’의 집이다. 던져둔 그물 속에 고기가 몇 마리 들어 있든, ‘나’는 그것을 영혼의 동료들과 나눌 것이다. 무너뜨리고, 무너져야 비로소 나타나는 길이 있는 것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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