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좀더 살아보자, 좀더 싸워보자

등록 2016-12-02 19:24수정 2016-12-02 20:15

[토요판] 조광희의 시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는 대사로 풍자의 대상이 되었던 이화여대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씨의 커넥션을 밝히는 데 공을 세우면서 새삼 재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대에 대해 늘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나도 이대를 나왔기 때문이다. 아니, 이대 부속중학교를 나왔다. 1980년께 전국에서 드물게 한 반에서 남녀가 같이 수업을 받는 공학이었고,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배려와 따뜻함은 남달랐다. 여자 선생님의 대부분은 이대 사범대 출신이었는데, 나는 학창생활 중에서 드물게 사랑받고 보호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그 학교에서 시를 배웠다. 방법은 단순했다. 2학년 국어 선생님은 매년 당신이 수업을 맡은 반 아이들에게, 각자 장부를 만들고 학기 동안 자신이 외운 시를 기록하게 했다. 외웠는지 여부는 친구 앞에서 낭송을 해서 확인했다. 학교에서 제일 많이 외워야겠다는 경쟁심에 사로잡힌 나는 외우기 쉬운 짧은 시를 발굴하기도 하면서 밤낮없이 암송에 몰두했다. 이 35년 전 노력으로 인해, 예술이 주된 직업이 아닌 한국 아저씨로는 드물게 시를 애호하는 사람이 되었고 그 덕분인지 개저씨(?)를 겨우 면했다.

처음 시를 외울 무렵에는 김소월, 김광균, 조지훈, 유치환의 시를 좋아했다. 그 이후로는 점점 평소에 시를 읽는 일이 줄어들고, 간혹 각광받거나 추천받는 시집이 생기면 읽게 된다. 최영미, 이성복, 황지우, 기형도, 김경주, 김사인, 김소연 등의 시가 그랬다. 선배 세대의 시를 뒤늦게 읽으며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김지하의 시, 그중에서도 ‘황토길’을 뒤늦게 읽었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노년에 이루어진 그의 동의하기 어려운 정치적 선택에 대해 나는 관대할 수밖에 없다.

선배 세대의 시를 뒤늦게 읽은 것 중의 하나가 정희성 시인의 시집이다. 이미 존재를 알았으나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 1990년께 당시 자주 가던 신촌로터리의 어느 서점에서 구입했다. 한 사내가 해질녘 강변에서 삽을 씻는다. 그리고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운다. 그 단순한 정경에서 시인은 삽 한 자루에 의지해 살아온 어느 일생의 슬픔을 발견한다. 나는 평생 종이만을 만져왔건만, 썩은 강물에 뜨는 달을 보며 삽을 씻는 이 사내의 일생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거친 세상이란, 이 암담한 노동이란, 혼자 감당하고 가기에는 얼마나 고달프고 아스라한 것인가.

지쳤을 때, 세상이 왜 이 모양일까 화가 날 때, 두려울 때 또는 작은 승리에 교만해질 때, 나는 가끔 이 시를 꺼내서 읽는다.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구절에서 나는 매번 울컥한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삽을 든 그 사내로 말미암아,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형일 수도 있는 그 사내로 말미암아,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속일지라도, 좀더 살아보자, 좀더 싸워보자”고 다짐하곤 한다.

조광희 변호사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1.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내가 정치인이냐? 내가 왜?”… 임영웅 소속사는 아직 침묵 중 3.

“내가 정치인이냐? 내가 왜?”… 임영웅 소속사는 아직 침묵 중

2024년 음원 강자는 아이유·임영웅·에스파 4.

2024년 음원 강자는 아이유·임영웅·에스파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5.

중립 기어 밟는 시대, 가수 이채연의 ‘소신’을 질투하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