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시 1 신동엽
스칸디나비아라던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소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갯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트럭을 두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도 탱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 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 소리 춤 사색(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
*<월간문학> 1968년 11월 창간호에 발표
탄핵 표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이 시를 골라 두었는데 설사 부결됐다 하더라도 다른 시로 교체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가결이건 부결이건 당분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화두는 ‘대통령’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스칸디나비아 반도지역의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를 작은 풍경화 한 편으로 한국 사회에 제시”(김응교)한 시라고 해도 좋고 그냥 유토피아에 대한 몽상이라고 해도 좋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에 이명박 박근혜 두 대통령의 체제를 경험하는 동안 더 자주 거론됐고 또 마주치게 된 시이기도 하다. ‘우리가 꿈꾸는 대통령’을 말할 때 인용하기 좋은 시이고 실제로도 그래왔지만 그렇게 한정되고 말 작품은 아닌 것 같다.
문학교과서에 수록된 ‘껍데기는 가라’로만 기억되는 것 같고, 언젠가부터 그의 시를 고리타분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많아진 느낌이다. 그를 일러 “50년대에 모더니즘의 해독(害毒)을 너무 안 받은 사람 중의 한 사람”이라면서 그가 행여 “쇼비니즘”으로 흐르지 않을까 걱정이라고 한 사람은 김수영인데 이런 시선은 예전부터 꾸준히 존재했던 터다. ‘껍데기는 가라’만 해도 거기서 ‘배타적 순혈주의’와 ‘낭만적 농본주의’의 위험을 감지하는 독법이 틀렸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근래의 사례로 오성호, <낯익은 시, 낯설게 읽기> 참조). 이런 비판에는 유념하되 위의 시에서 지금도 여전히 의미 있는 논점을 세 가지 정도 추려보고 싶다.
가장 먼저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에 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구절의 아름다움만으로 이 시가 끝까지 버텨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이라는 심상한 표현에는 그 직업이 세상의 수많은 직업들 중 하나일 뿐이라는 담백한 긍정이 담겨 있다. 세상의 중요한 사람들 중에는 ‘의무’와 ‘권력’을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들에게 많은 것은 의무이지 권력이 아니어야 한다. 이 시에서 국민이 대통령에게 허락한 것은 “아름다운 석양”을 등 뒤에 두고 걸으면서 ‘석양의 대통령’이라 불릴 수 있는 권력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큰 영광인가.
그러니까 이 시의 첫 번째 논점은 당연히 ‘평등’이다. 다시 읽은 이 시는 한창훈의 소설 ‘그 나라로 간 사람들’(<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을 떠올리게 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이 모여 법을 만들 때 그들은 법이 아주 단순하기를 바랐다. 그중 누군가 바다로부터 법철학을 배운다. 나날의 파도는 다르지만 하루의 파도는 같다는 것. “그제는 한 팔 정도의 파도가 쳤는데 모두 그 높이였어요. 어제는 가문비나무 높이만큼 치솟았는데 모든 파도가 그랬어요.” 다른 사람들이 기꺼이 동의한다. “파도처럼 하면 되겠군.” 그리하여 그들이 만든 법조문은 단 한 문장이다.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보다 높지 않다.” 이 법으로 그들이 내리지 못한 결정은 하나도 없었다.
두 번째로 밑줄 치고 싶은 대목은 광부들이 “하이데거 러셀 헤밍웨이 장자(莊子)” 등을 주머니에 꽂은 채 퇴근하는 장면이다. 광산에서 그 책을 읽었다는 뜻이다. 농민들 얘기도 해야 할 텐데, 그들이 트럭을 두 대씩 소유하고 대리석 별장에 산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잘 안다는 것이다. 자연과 예술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나름의 취향을 함양할 수 있는 여유가 주어진다는 것. 광부와 농민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한다고 부르짖던 시대도 있었지만, 진정한 유토피아는, 이처럼 광부와 농민이 이해 못할 작품이 없을 만큼 그들에게 교육과 시간이 제공되는 사회다.
그러니까 이 시의 두 번째 논점은 ‘소외’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사회적 분업’으로 인한 소외가 사라진 사회를 꿈꾸었던 이들의 저 유명한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아무도 배타적인 영역을 갖지 않고 각자가 원하는 어떤 분야에서나 스스로를 도야시킬 수 있는 공산주의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인 생산을 조절하기 때문에 사냥꾼, 어부, 양치기 혹은 비평가가 되지 않고서도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즉 아침에는 사냥을, 오후에는 낚시를, 저녁에는 목축을, 저녁식사 후에는 비평을 할 수 있게 된다.”(마르크스·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세 번째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시의 중반부에 박혀 있는 “중립국”이라는 단어다. 그러니까 이 시의 배경이 되는 나라가 이런 나라일 수 있는 것은 그곳이 중립국이기 때문이다. 신동엽의 시 곳곳에 ‘중립’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껍데기는 가라’에서도 알몸을 드러낸 아사달과 아사녀는 다름 아닌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을 하기도 했던 터다. 한국문학 연구자들은 이미 이십 수년 전부터 신동엽 문학에 내재된 정치철학을 ‘중립의 사상’이라 이름 붙이고 거기서 “유토피아적 공동체의식”(김윤태)이나 “비위계적이면서 유기체적인 관계”(김희정) 등을 활발히 읽어내고 있는 중이다.
위의 시 역시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는 시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이 시의 세 번째 논점을 ‘중립’이라고 해보자. 중립의 사상이란 결국 평화의 사상이다. 시인은 이 나라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어느 쪽 패거리에도 총 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지성(知性)”이 있다고 적었다. 또 “상처 내는 미사일기지 탱크기지”는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라고도 적었다. 시인이 이 나라를 “사나이 나라”라고 치하한 것은, 어느 한쪽을 편들며 참전하는 것이 용기가 아니라 그 반대가 진정한 용기라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평화를 지지할 줄 아는 용기가 ‘사나이’만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신동엽에게 분명히 말해주어야 하겠지만.)
물론 50년 전 시에서 오늘의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산문시 1’ 같은 작품은 삶과 정치에 대한 그의 안목이 만년에 이르러서도 사뭇 표피적이었음을 보여준다”(고종석, <모국어의 속살>)라는 냉정한 평가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내용을 채우고 또 실천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리라. 박근혜 대통령과 보낸 지난 4년은 위의 시가 노래하고 있는 세계와 정확히 반대였다. 이 시의 메시지는 쉽다면 쉬운 것이겠지만, 언제나 그렇듯 쉬운 말을 실천/성취해내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렇게까지 절절하게 체험해야 한다는 것도 이 나라 국민의 불행일 것이다. 불행은 이제 겪을 만큼 겪었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석양의 나라’로 가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