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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는 가시 면류관이다

등록 2016-12-09 19:52수정 2016-12-09 20:06

[토요판] 이 주의 시인, 김재석
구름의 파업

구름의 귀는 얇은 것인가

누가 구름에게 거슬리는 소리를 하였기에
누가 구름에게 거슬리는 소리를
구름에게 고자질해
구름은 배가 난 것인가

구름은 빈둥빈둥 놀기만 하고
순한 짐승들에게마저
등을 돌리니

구름은 변덕이 심해 믿을 놈이 못 된다고
누군가가 뱉은 말을
사람들 전부의 말로 알아들은 것인가

자신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우연히 듣고
배가 단단히 난 구름이
못 들은 척 시치미를 떼는 것인가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라는,
오색구름이 꽃을 피우며라는 가사를
구름은 들어봤을 것이 틀림없는데

자신을 귀히 여기는 말에는 귀를 닫고
거슬리는 말에만
귀를 연 구름은 결벽증 환자인가
(이 말도 구름의 귀에 들어갈까 무서워야)

구름은 배가 나면 오히려 냉정하니
구름이 배를 돋우어
이성을 잃고 난장을 피우기도 해야,
순한 짐승들이 목마름을 해소하지

구름의 귀는 두꺼운 것인가

시집 <구름에 관한 몽상>(작가세계, 2015)에 수록

1980년 ‘광주시민의 불복종’이 있었던 그해 봄날 나는 군복무를 마친 대학 3학년 복학생이었다. 인문대 뒤 하숙집에서 위태로운 시간을 보낸 나는 광주를 떠나 시골집에 머물렀다. 여름 내내 실의에 젖어 있던 나와 함께한 책이 존 스타인벡의 <생쥐와 인간>이었다. 이 소설은 존 스타인벡의 고향이기도 한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설리너스강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는데 소설의 마지막 장 역시 설리너스강에 대한 묘사로 시작되었다.

“물뱀 한 마리가 잠망경 같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상류를 향해 미끄러지듯 헤엄쳐 올라갔다. 강물을 가로지른 물뱀이 얕은 모래톱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왜가리 다리 앞에 다다랐다. 적막 속 머리와 부리가 창이 되어 물뱀의 머리를 내리찍고 낚아챘다. 그리고는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들어대는 작은 뱀을 삼켜버렸다.”

마지막 장의 이 장면은 나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서 ‘강변에서’란 시를 썼다. 에즈라 파운드의 시구를 에피그래프 삼고 <생쥐와 인간>이란 소설의 내용을 인유한 처녀작을 나는 영어로 번역하여 모교의 영자신문에 실었다.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그들 중에는 훌륭한 인물도,/ 이빨 빠진 늙은 암캐를 위하여,/ 금간 문명을 위하여,(에즈라 파운드)

때 아닌/ 왜가리 한 마리가 뱀을 물고/ 江 건너 갈대밭 새로/ 사라진 뒤,/ 벌거숭이 강변에 물새가 운다// 저 멀리 논과 밭/ 열병을 앓아 呻吟하는/ 대지의 가녀린 젖가슴을/ 쟁기꾼의 보습이 더듬거리고// 거역할 수 없는 몸짓으로/ 한 송이 들꽃을 피워내는/ 물때를 따라 조개를 캐러가는/ 江마을 여인들//(중략)// 굶주린 강물에 타는 저녁놀/ 마을을 불사르고/ 世紀를 불사르니// 놀란/ 은피라미떼/ 終末처럼 줄달음치며/ 뛰어오른다.”(‘강변에서’ 부분)

나는 이 시를 인연으로 남은 대학생활을 시로 일관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T. S. 엘리엇, 월리스 스티븐스, 로버트 프로스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같은 영미 시인들은 나의 시작에 커다란 자양분이 되었다. 그 시절 서정주, 김춘수, 박용래, 신경림, 문병란, 조태일, 송수권, 이시영, 김준태, 곽재구 같은 시인들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그 뒤 언제나 직관에 의존하여 시를 쓰는 나에게 물질적 상상력의 보고인 바슐라르가 찾아왔다. 바슐라르는 나로 하여금 천체와 바다에 관한 시 쓰기에 몰입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낳은 시집이 <구름에 관한 몽상>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지명수배되다>이다.

<구름에 관한 몽상>은 오래전에 낳은 <달에게 보내는 연서>와 <별들의 사원>의 바통을 받은 시집이다. 구름은 바슐라르가 가장 몽상적인 시적 오브제들 중의 하나라고 하였다. 어느 시인은 구름에서 십이간지를 읽어내기도 했다. 천체에 관한 시집마다 해와 달, 별 그리고 구름에 관한 시가 실려 있다. 달과 별, 그리고 구름이 한 차례씩 주연을 맡았으니 이제 마지막 주연은 해다. 몇 달 전에 <해와의 인터뷰>란 시집을 탈고하였다. 사백 계주에서 마지막 주자가 바통을 받고 달리듯 머지않아 <해와의 인터뷰>가 바통을 받을 것이다. 제목은 해와 관련돼 있으나 그 시집 속에 구름에 대한 시편들도 실려 있다. 구름은 파업도 하지만 새로 태어날 구름들을 위하여 자리를 내주기도 한다. 해와 달, 별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구름이 한다.

‘시는 가시 면류관이다’를 스스로 체득한 어느 날 보들레르, 베를렌, 랭보, 발레리 그리고 아폴리네르를 만났다. 그들은 내게 ‘시는 감각의 전이이다’, ‘시는 이치에 맞는 착란이다’, ‘시는 내던져지는 것이지 완성된 것이 아니다’ 등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특히 보들레르는 모던하지 못한 시를 쓰는 나에게 시의 현대성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다.

전업시인의 길을 걸은 지 오 년이 다 돼 간다. 그동안 자비로 시집을 너무 많이 내 곳간이 비었다. 책 사볼 푼돈도 못 건졌다. 가족들의 질타를 받았다. 여기저기서 말도 무성하다. 나도 구름처럼 파업을 해야 하나. 나의 귀는 얇은 것인가 두꺼운 것인가.

김재석 시인

*1990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했으며 2008년 유심신인문학상 시조 부문(필명 김해인)에 당선했다. 시집으로 <까마귀> <샤롯데모텔에서 달과 자고 싶다> 등과 번역서로 <즐거운 생태학 교실>, 시조집으로 <내 마음의 적소, 동암> 등이 있다.


‘구름’이 파업할 수밖에 없는 현실

파업은 노동 조건을 유지 또는 개선하기 위해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일을 하지 않는 ‘파업’은 일을 하는 ‘노동’의 단순한 반대말이나 결여태가 아니다. 파업은 ‘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 즉 역설적이게도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서 무위(無爲)를 행하는 일이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잠시 쉬는 휴업과 다르고, 일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실업과도 다르다.

‘구름’은 왜 파업하는가. 이 시에서 구름은 세상의 일에 관심이 없고, 누구의 어떤 말과 행위에도 반응하지 않는 매우 소극적인 모습으로 묘사된다. 구름이 파업하는 이유는 정확히 서술되어 있지 않은데, 시적 화자가 진술하는 구름의 파업은 이기적이고 불순한 태업(怠業)의 양상마저 띤다.

그렇다면 구름의 일(업(業))은 무엇인가. 단서는 두 가지다. 현재 구름이 “순한 짐승들에게마저/ 등을 돌리”고 있는 것과,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해 주지 않고 있는 것. 구름의 일은 비가 되어 지상의 목마름을 적셔 주는 일이다. 구름의 파업이 시적 화자에게 밉살스러운 ‘태업’으로 비치는 것은 지상의 목마름이 그만큼 갈급함을 반증한다.

지상의 목마름의 대상은 ‘비’의 물질적 혜택에 한정되지 않는다. 유사 이래 인간이 ‘구름’에 기탁해 온 모든 덕목, 꿈, 희망, 이상, 몽상, 자유, 비상(飛上), 경계 없음 등을 아우른다. 구름이 파업하는 현실은 구름이 상징하는 ‘다른 가능성’들과 ‘사방으로 무한히 열린 길’이 막힌 현실을 뜻한다. 이 순간, 우리 앞에 떠오르는 것은 다시 시와 문학의 오랜 능력이며 전통이다. 자신을 부정하는 현실 속에서 자신과 세계의 미래를 긍정하며 분투해 온 능력. 현실의 불능과 불의에 눈을 감느니 차라리 파업함으로써 항거해 온 전통. 무위를 행위로, 침묵을 함성으로 마침내 바꾸며 다른 세계의 비전을 펼쳐 온 능력과 전통.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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