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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폐쇄된 정원의 여인

등록 2016-12-09 19:52수정 2016-12-09 20:10

[토요판] 준(장혜령)의 시, 초록을 말하다
초록을 말하다  조용미

초록이 검은색과 본질적으로 같은 색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 언제였을까
검은색의 유현함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검은색 지명을 찾아 떠돌았던 한때 초록은
그저 내게 밝음 쪽으로 기울어진 어스름이거나 환희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는데

한 그루 나무가 일구어내는 그림자와 빛의 동선과 보름 주기로 달라지는 나뭇잎의 섬세한 음영을 통해
초록에 천착하게 된 것은 검은색의 탐구 뒤에 온, 어쩌면 검은색을 통해 들어간 또 다른 방
그 방에서 초록 물이 들지 않고도 여러 초록을 분별할 수 있었던 건 통증이 조금씩 줄어들었기 때문

초록의 여러 층위를 발견하게 되면서 몸은 느리게 회복되었고 탐구가 게을러지면 다시 아팠다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처럼 꺼내어도 꺼내어도 새로운 다른 초록이 나오는,
결국은 더 갈데없는 미세한 초록과 조우하게 되었을 때의 기쁨이란

초록은 문이 너무 많아 그 사각의 틀 안으로 거듭 들어가기 위해선 때로
눈을 감고 색의 채도나 명도가 아닌 초록의 극세한 소리로 분별해야 한다는 것,
흑이 내게 초록을 보냈던 것이라면 초록은 또 어떤 색으로 들어가는 문을 살며시 열어줄 건지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폭우와 초록과 검은색의 뒤엉킴이 한꺼번에 찾아드는 우기의 이른 아침
몸의 어느 수장고에 보관해두어야 할까
내가 맛보았던 초록의 모든 화학적 침적을, 오랜 시간 통증과 함께 작성했던 초록의 층서표들을

오래전 소녀였던 나는 놀라운 눈으로 한 신문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것은 지금까지도 내가 알지 못하는 시인의 이야기다. 기사는 시인이 사랑에 실패한 뒤 오랜 시간 그에 관한 시를 써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세를 떠나 정처 없이 이곳저곳을 방랑하기도, 그러다 산사에서 지내기도 했다. 나는 사진 속 목도리를 두른 채 미소 짓는 여자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일찍 늙어버린 소녀의 얼굴이었다.

산속의 겨울은 내가 알지 못하는 계절이었다. 과연 어떤 사랑이 한 여자를 깊은 산속으로 옮겨 놓고 스스로 고독 속에 머물게 하는 걸까. 한 사람을 오래 사랑했더라는데 기억에서 벗어나려 달아난 곳에서 방심하던 한때, 그의 얼굴이 연못에 떠오르더라는 건 대체 무슨 말일까. 그녀의 눈동자를 통해, 언젠가 그녀가 보았을 얇은 얼음 내려앉은 연못물이 비쳐 보이는 듯했다.

이 이야기는 내가 어린 나이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던 삶의 비밀을 담고 있었다. 어른들의 사랑이 무엇인지 채 알기도 전에 이별에 대한 너무 깊은 이야기를 들어버렸던 것이다.

조용미 시인의 시는 사랑하는 여인의 정념을 엿보았던 어린 시절의 불가해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실제 시인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시집 <기억의 행성> 속의 화자는 왠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너를 사랑하는 일’의 괴로움으로 수없이 길 떠나는 사람이다. ‘너의 얼굴을 보려 수많은 생을 헤’맨 사람이다. 떠난 곳의 풍경 앞에서 그녀는 여전히 그 사랑이 잊히지 않음을 본다. 사랑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그루 나무가 여전히 당신이라는 존재와 맞닿아 있음을 발견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그녀는 늘 아픈 몸으로 누워 천장을 마주한 채 그만큼의 긴 시간을 소요하곤 한다. 또 불면의 시간이 찾아올 때면 가만히 그 통증을 바라보기도 한다. 우리에게 몸이 없었다면 통증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증이 없었다면 그토록 천천히 바라볼 시간 또한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몸이 있다는 것은 불편하지만 동시에 감각적인 일이다. 매일 이별하고 있음을 직시하는 아픈 사람의 감각. (아픔은 병듦과는 다르다.) 이별의 아픔은 우리를 깨어 있는 상태로, 세상을 찬찬히 바라보게 만든다.

그녀의 삶은 자연히 식물적인 것에 가까워진다.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뻗어나가는 줄기, 활짝 벌어지는 꽃잎과 호흡의 관능에 그녀는 서서히 눈을 뜬다. 이처럼 고독한 사람의 적막 속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뜻밖의 세계를 여는 문이 있다는 것을 조용미 시인의 시를 통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암흑의 심연을 오래 들여다보곤 검은색과 초록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사람, 암흑 너머에 깃든 초록의 색채를 ‘극세한 소리로 분별’하는 사람이다.

그 문을 열어볼 만큼 사랑을 기다린 이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새벽에 깨어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풍경. 그렇게 얻게 된 풍경은 그녀의 표현대로 ‘헛’되고 헛되었으나 빼어나게 아름답다. 그녀의 시를 읽을 때면 언제나 ‘늦은 사랑의 깨달음’ 같은 비가 내리는 비밀스러운 정원에 들어서게 된다.

준(장혜령) 네시이십분 팟캐스트 라디오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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