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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내 방에 드리운 어둠

등록 2016-12-23 19:44수정 2016-12-23 20:34

[토요판] 임경지의 시
서울에서 살아남기-대학 새내기들을 위하여   최금진

가게에서 물건을 사거나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통성명을 할 때
돌아와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거만해야 한다
엔젤이라고 발음하는 너의 콩글리시에는 천사가 살지 않는다
서울에 천사가 있다면 그건 CCTV일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늦은 밤엔
최대한 예쁘게 포즈를 잡아도 좋다, 경찰이 아니라 CCTV가 너를 지킨다
젊어 고생은 사서 하는 것인가, 그렇다
고생은 너의 출세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인가, 아니다
항복, 할복, 항복, 할복, 어떤 것이 행복을 위해 더 명예롭고 윤리적인가
학교를 그만둔다 해도 나무랄 사람은 시골에 계신 부모님뿐이고
잉여인간, 너 같은 애들은 값싼 정부미처럼 창고에 넘친다
교양시간에 배운 플라톤을 성공한 사회사업가라고 말해도 좋다
1960년 4월혁명 이후에 서울에도 봄은 온다
대기업에 취직을 하든 낙오자가 되든 그것은 너의 자유
서울에 개나리가 지천으로 핀다고 해서
그게 백합과인지 나리꽃과인지를 고민하는 것은 넌센스이듯
부모의 능력이 어째서 자식의 우울증이 되는지는 어떤 연구도 통계도 없다
아프면 전기장판 깔고 눕고, 아스피린 따위의 값싼 약이나 먹고 자라
전기세는 늙고 병든 네 부모의 몫이니까 마음껏 쓰고
성적 욕망이라고 부르기엔 왠지 거룩한 연애 혹은 사랑의 감정이
가스 배관선을 타고 기어오르는 도둑놈처럼 방문을 두드릴 때
다 줘버려도 괜찮다고 생각한다면
인생 한방에 가는 거다
도를 아냐고 묻는 사람은 그래도 도를 믿는 사람이지만
도를 정말로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자는 사기꾼
무조건 거만해야 한다, 거만하지 않으면
자신만 거만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항복, 할복, 항복, 할복, 모든 선택은 성적순이며
지하철역에서 무장공비처럼 누워 자는 사내들도 한때는 전투적으로 국가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들
너의 황달이 든 얼굴과
고향에 지천으로 피던 민들레꽃이 심리적으로 일치할 때
결핍을 상징하는 그 노란색이 아지랑이처럼 자꾸 어른거릴 때
게임아웃, 넌 끝난 거다
1960년 4월혁명 이후, 서울에도 봄은 오지만
민주주의가 꼭 민주적이란 뜻은 아니다
서울 시내 CCTV는 모두 일만팔천대
너 같은 애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녹화되고, 재생되고, 지워진다
대학은 나와야 사람 구실 한다고, 네 늙은 아비는 울었다
그러나 네게도 실업자가 될 자유는 있다

보증금 300만원을 들고 찾아간 부동산, 희미한 웃음을 보이며 반지하방을 연달아 보여줬던 아저씨가 떠오른다. 그때 알았다. 나는 이 도시에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을. 돈이 곧 부동산과 집주인의 함박웃음의 소리를 결정하고, 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선의 높이를 결정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고, 성실하게 돈을 벌면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갈 수 있겠지라는 마음을 품었다. 하지만 빽빽한 원룸촌 한가운데 있는 내 방은 아침인지, 밤인지, 오늘인지, 내일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채 나의 하루는 연명되고 있었다. 밝은 내일이라는 말은 내 인생에 없는 말과도 같았다. 쉬는 날에는 철학자가 된다. 방바닥과 몸이 일체가 되어 질문을 계속 던진다. 인간이란 무엇인지, 삶이란 무엇인지, 고통을 겪으면 반드시 성장하는 것인지 등등, 생의 실체를 찾느라 애쓰는 질문이었지만 사실은 시체가 되어가는 중이었던 건 아닌가. 20대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2010년 인구주택총조사 기준, 서울에서 독립해 살아가고 있는 청년(만19~34살) 10명 중 3명은 주거빈곤이다. 주거빈곤은 최저주거기준 미달이거나 반지하 또는 옥탑, 그리고 고시원과 같은 주택이 아닌 곳에 사는 것을 말한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부터는 거주 층을 조사하지 않아 2010년이 그나마 정확한 수치다. 한편, 2년마다 국토교통부에서 실시하는 주거실태조사에는 옥탑방에 사는 30대는 한 명도 없는 것으로 나온다. 망원시장 근처 옥탑방에 사는 걸로 프로그램에 나와 유명해진 장미여관의 육중완씨는 방영 당시 34살이었다.

열악한 주거 환경도 문제지만 타워팰리스보다 평당 임대료가 2배 비싼 월세도 문제다. 기가 막힐 일이다. 월세만 그런가. 관리비도 원룸이 아파트보다 비싸다. 세입자가 원하는 만큼 살 수 있지도 않다. 집주인이 나가라면 또 나가야 되는 게 우리들의 형편이다. 서울살이 설움의 원인은 나의 잘못에서도, 부족한 부모에게서도 오는 것이 아니다. 불공정한 월세 시장과 이를 방치하고 있는 사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국정농단과 비선실세의 주인공인 최순실의 직업은 임대업으로 공소장에 적혀 있다. 최순실이 강남의 한 빌딩에서 벌어들이는 임대소득만 월 6600만원이라고 한다. 16년 근속한 소령의 연봉이 6600만원이다. 2017년 최저임금은 6470원이다. 최순실 자매 역시 강남 빌딩 부자로 익히 알려져 있으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출석한 장시호는 본인의 아버지 직업을 임대업이라 밝혔다. 이들이 낸 세금이 얼마인지 국세청이 발표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현재 임대소득은 의무 과세 대상이 아니다. 본래 박근혜 정부는 2014년부터 임대소득에 대한 과세를 실시하려 했으나 스스로 그 말을 세 번이나 번복하며 시행되지 않고 있다. 부정부패를 저지른 그들이 불로소득의 상징인 임대사업자라니. 퍽 어울린다는 생각에 쓴웃음이 난다.

지난 8주, 다 쓰러져 가던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힘으로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런데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원룸에 살면서, 최순실은 임대소득을 내지 않아도 되는 사회에서 서울 새내기에게 민주주의는 어떻게 다가올까. 수많은 열망을 담은 촛불 속에서 노랗게 뜬 얼굴의 서울 새내기들과 수많은 최순실, 박근혜가 겹쳐진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더 큰 힘으로 내 방에 든 어둠과 사회에 든 어둠을 함께 몰아낼 때다.

임경지 민달팽이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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