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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 나날들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등록 2016-12-23 19:44수정 2016-12-23 21:30

[토요판] 신형철의 격주시화(隔週詩話)
-연말연시를 필립 라킨과 함께
나날들 Days    필립 라킨(Philip Larkin)

나날들은 왜 있는가?
나날들은 우리가 사는 곳.
그것은 오고, 우리를 깨우지
끊임없이 계속해서.
그것은 그 속에서 행복해지기 위해 있는 것: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리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아, 그 문제를 풀자면
사제와 의사를 불러들이게 되지
긴 코트를 입은 채로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그들을.

*시집 <성령강림절 결혼식들>(The Whitsun Weddings, 1964)에 수록. 번역은 필자의 것.

학과 내 영화비평학회 학생들이 소개해 준 단편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작은 큐브로 만든 집>(la maison en petits cubes)이었다. 해수면 상승으로 조금씩 물에 잠기는 마을. 많은 이들이 떠났지만 주인공 독거노인은 때가 되면 아래층을 포기하고 새로 한 층을 올려 옮겨가는 식으로 버틴다. 어느 날 이사를 하다가 담배 파이프를 아래층으로 떨어뜨리는 실수를 저지르자, 노인은 아예 잠수 장비를 갖추고 그것을 찾으러 내려간다. 물건은 금방 찾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그곳에서 살던 때의 기억까지 떠올라 금방 다시 올라와지지가 않는다. 그래서 내처 계속 내려가 보기로 결심한다, 더 깊은 과거의 추억 속으로.

말하자면 이런 은유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아래쪽에서 위로 점점 물이 차오르는 일이며 그렇게 한 단계를 넘어갈 때마다 지난 시간들은 수몰되는 집처럼 그 형태 그대로 가라앉는다.’ 그런데 그 과정을 막을 수는 없고 다만 잠수하듯 상기해볼 수만 있을 뿐이라는 얘기다. 그렇게 한 층씩 아래로 내려갈 때마다 그는 역순으로 과거와 재회한다. 아직 아내가 살아 있던 때를, 딸이 결혼할 남자를 데려왔던 때를, 어린 딸이 식탁 주위를 뛰어다니던 때를, 그리고 아직 도시가 물에 잠기기 전 그와 아내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던 때를. 어느새 바닥(1층)까지 내려와서 올려다보니 자신의 집은 너무 높고 멀다. 언제 이만큼이나 산 것인가.

이 작품을 보는 12분 동안 한 사람의 일생을 다 살아 버렸다. 그러는 동안 눈물을 참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처음이 아니다. <업>(up)을 볼 때도, <시계추>(振り子)를 볼 때도 그랬다. 긴 인생을 짧게 줄여 놓은 파노라마 영상을 볼 때면 으레 눈물이 흘렀다. 이미 살고 난 뒤에 되돌아보면 일생이란 저렇게 짧게만 느껴지겠구나 싶은 안타까움 때문이었을까. 더 근원적인 감정은 어떤 분함에 가까웠다. 일생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 살고 나서 돌아보면 그 많은 날들은 가뭇없고 속절없는가, 왜 우리는 그 나날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시간을 사는 인간의 이런 종(種)적 결함이 원통해서 눈물이 났던 것일까.

그러자 20세기 중반 영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이었던 필립 라킨의 가장 유명한 시 중 하나인 ‘나날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앞의 애니메이션에서 시간의 각 단계는 집의 한 층으로 표현됐거니와, 라킨의 시에서도 우선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런 식으로 시간을 공간화한 표현들이다. 그는 하루하루의 나날들을 “우리가 사는 곳”이라고 규정한 다음, 이 시의 핵심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리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Where can we live but days?) 이런 표현의 묘미는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문답을 상상해 보면 좀 더 또렷해진다. ‘어느 곳에서 사십니까?’ ‘저는 하루하루의 나날들 속에서 삽니다.’

이렇게 시간을 공간적으로 생각해보는 상상력이 우리에게 어떤 새로운 삶의 감각을 열어줄지에 대해서도 음미할 것이 적지 않지만 아무래도 이 1연만으로는 좀 아쉽다. 실은 이 시를 두고 흔히 ‘비의(秘意)적인 시’(enigmatic poem) 운운하는 것은 이어지는 2연 때문이다. 나날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과연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에 대해 라킨은 2연에서 “그 문제를 풀자면 사제와 의사를 불러들이게 되지”(solving that question brings the priest and the doctor)라고 적었다. 이 답변 아닌 답변도 기묘하지만, 사제와 의사가 그들 각자의 유니폼을 나부끼며 들판을 달려오는 장면으로 장식한 마무리 역시 기묘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테리 이글턴은 <시를 어떻게 읽을까?>(2010)의 ‘애매성’ 항목에서 이 시를 인용하고 이렇게 적었다. “사제와 박사[의사-인용자]는 이 형이상학적인 질문자에게 위안과 충고를 가져다주려고 달려가는가, 혹은 그들은 그를 속박하려고 돌진하는 블레이크적 인물들인가? (중략) 그래서 우리는 어떤 어조로 마지막 연을 읽어야 할지, 소름끼치는 어조로 읽어야 할지 혹은 침착한 어조로 읽어야 할지 모른다.”(박령 옮김, 경성대출판부, 234쪽) 지금 이글턴이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좋은 시에서 가끔 발견되는 매력적인 애매성의 한 사례로 인용하고 있는 것일 뿐.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애매함은 풀릴 수 있는 애매함으로 보인다.

이글턴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다시 1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킨은 왜 시간(days)을 장소(where)로 상상했던가. ‘지금은 곧 여기일 뿐’이라는 뜻이고, 거꾸로 말하면, ‘여기에서의 지금’ 외의 다른 시간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단 한 번의 인생, 그 인생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다른 대안이 있는가?(“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그중 하나가 사후세계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사제’와 ‘의사’가 필요하리라. 예나 지금이나 내세의 존재 여부에 대해 말해줄 수 있는 영역은 종교와 의학(과학)이니. 물론 라킨은 인간의 이런 미혹 혹은 의존에 부정적이며, 그래서 그의 “아”(Ah)는 경탄이 아니라 탄식에 가까워 보인다.

이제 이글턴이 언급한 이 시의 애매성이 해소됐다고 말해볼 수 있을까? 이글턴의 첫 번째 물음은 이것이었다. ‘사제와 의사의 돌진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위안인가 속박인가?’ 나의 대답은 ‘둘 다’라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불행한 사람에게 사후세계를 설파하는 일은 그런 ‘위안’에 ‘속박’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물음은 이것이었다. ‘이 2연을 어떤 어조로 읽어야 할 것인가, 소름 끼친다는 듯이? 아니면 침착하게?’ 아마도 가장 적합한 표현은 ‘착잡하게’가 아닐까. 사제와 의사라는 엄숙한 권위자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모습을 그리는 2연에서 나는 다소 이죽거리는 듯한 유머를 감지한다. 그런 유머는 착잡하다.

그렇다고 지금-여기의 유일함을 강조하는 라킨의 시가 니체 식의 ‘대지에의 찬가’와 유사한 것으로 오해될 필요는 없어 보인다. 그의 가장 인상적인 시들은 대체로 삶에 대한 냉소적인 지혜를 품고 있다. 이 시의 톤 역시 그렇다. ‘젠장, 이 나날들뿐이야, 대안은 없어.’ 해수면이 상승하듯 시간이 흐르고 수몰 지구처럼 과거는 가라앉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연말에, 주어진 나날들을 백퍼센트로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종적 결함을 실감하는 연말에, 이런 시를 읽는 것은 유용한 일이다. 기왕이면 해를 넘겨 연초까지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질 2017년의 365개의 나날들, 그것들 외에 또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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