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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거미 생각

등록 2016-12-23 19:46수정 2016-12-23 20:29

[토요판] 이 주의 시인, 김참
거미와 나  김참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내가 소파에 누워 책을 읽는 동안 배고픈 거미는 내 발톱을 갉아먹고 조금씩 살이 오른다. 내가 낮잠을 자면 거미도 내 귓속에서 낮잠을 자고 내가 노란 꽃 활짝 핀 해변을 거닐면 거미도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꾼다. 어두운 부엌에서 늦은 저녁을 먹는 동안 거미는 줄을 타고 내려와 내 발가락을 갉아먹는다. 봄이 와서 마당 가득 분홍빛 모란이 피면 거미는 집 곳곳에 투명한 집을 짓는다. 벌레들의 무덤을 만든다. 우리 집엔 귀가 넷 달린 거미가 산다. 초승달 뜬 하늘에 하얀 별 총총 박힌 어둡고 깊은 밤 거미는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여름이면 새로 태어난 거미들이 집 곳곳을 기어 다닌다.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를 작은 거미들. 장마가 지나가면 거미들은 투명한 줄을 타고 논다. 습하고 무더운 날이 계속된다. 거미는 내 살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빨랫줄에 걸린 생선처럼 조금씩 야위어간다.

계간 <작가와 사회> 2016년 여름호 수록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미 몇 마리가 우리 세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쌀눈보다 작은 거미 한 마리가 책장 근처에 작은 집을 짓고 사는 걸 며칠 전에 봤는데 눈을 씻고 다시 봐도 없다. 한달 전엔 새끼손톱만한 거미 두 마리가 현관과 장식장 사이에서 줄을 치고 살았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다. 줄을 치지 않고 사는 깡총거미도 한동안 텔레비전 선반 아래에서 출몰했는데 지금은 보이지 않는다. 큰방에 붙은 화장실에도 작은 거미 몇 마리가 살았는데 모두 사라져 버렸다. 월동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집 구석구석에 알을 슬어놓고 영면에 들어간 걸까.

아내는 거미 때문에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지만 나는 거미가 좋다. 거미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모기를 잡아준다. 무더위 때문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 겨우 잠들려고 하면 앵앵거리는 모기들,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모기들, 나는 앵앵거리는 모기 소리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피를 조금 빠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물린 데가 조금 가려운 건 참을 수 있지만, 단잠을 방해하는 앵앵거리는 소리는 정말 견디기 힘들다. 천국이 있다면 그곳엔 모기가 없을 것이다. 거미는 모기의 천적. 그래서 나는 거미가 좋다.

자세히 보면 거미는 제법 귀여운 구석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엔 거미 기르는 사람도 꽤 많다고 한다. 일부러 기르지 않아도 봄이 되면 거미들이 찾아와주니 반갑기도 하다. 거미 중에는 멋진 이름을 가진 것이 많다. 시를 쓰는 내가 생각해 봐도 감탄사가 나올 만큼 멋진 이름이 붙어 있는 거미들. 먼지거미, 유령거미, 늑대거미, 이슬거미, 공주거미 등등. 거미는 탈피도 한다. 껍데기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거미. 한번 탈피한 거미가 한번 더 탈피하여 애거미가 되면 알집 밖으로 나와 사냥을 시작한다. 애거미들은 부모와 형제들끼리 붙어서 생활하지만 몇 번 더 탈피를 하여 성체가 되는 동안 자기 영역을 만들어 간다.

거미가 사라진 집에서 나는 한동안 같이 살던 거미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거미는 눈이 많다. 눈이 한 개나 두 개인 거미도 있지만 눈이 네 개인 거미도 있고 여섯 개인 거미도 있고 여덟 개인 거미도 있다. 전 세계엔 3만 종이 넘는 거미가 있으니 크기나 색깔, 생김새, 생활방식이 각양각색일 것이다. 거미는 다리도 네 쌍이나 된다. 네 쌍의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줄을 탄다. 눈이나 다리는 많은 대신 거미는 귀가 없다. 안타깝다. 백과사전을 열심히 뒤져봐도 귀 달린 거미 이야기는 없다. 그렇다면 거미는 내가 듣는 음악이나 세 살짜리 아들이 우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귀 없는 거미에게 귀를 달아 주었다. 그것도 네 개나. 내가 십여 년 전에 쓴 시에 이미 귀가 넷 달린 거미가 등장한다. 그 시에서 나는 거미를 사람처럼 그렸다. 그때부터 나는 귀가 넷 달린 거미와 함께 살고 있다. 물론 그사이 결혼을 해서 이사를 한번 했지만 우리 집에 사는 거미는 여전히 귀가 넷이다. 내가 음악을 들으면 거미는 네 귀를 활짝 열어 나와 함께 음악을 듣는다. 아직 어린 아들이 울기라도 하면 거미는 나와 함께 울음소리를 들으며 슬픔에 잠긴다. 거미는 우리 집 식구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는 사이는 아니지만 어쨌든 거미도 우리 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니까.

호랑거미처럼 아름다운 색과 무늬를 띤 것도 있지만 단색을 띤 것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 잘생겼다. 그러나 미인은 박명이라 거미의 수명은 짧다. 한해살이부터, 한해 반이나 두해 사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다년생 거미도 있지만 수명이 긴 편은 아니다. 줄을 치고 사는 한해살이 거미들은 늦가을 산란하고 죽는다. 날씨도 추운데 먹이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우리 집에서 거미가 사라진 것도 이 때문이리라. 거미가 초식도 한다면 장수할 수도 있으련만. 한해살이 거미들은 알집에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 알속에서 나와 여름까지 성장해서 가을에 성체가 된다. 따뜻한 봄이 와 풀들이 연둣빛으로 번지면 거미들도 네 귀를 쫑긋 세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이다.

김참 시인


현실의 맨얼굴을 보게 하는 환상

김참은 1999년에 첫 시집을 냈다. 세기말의 불안한 정서와 미래에 대한 어두운 예감이 무성하던 때였다. 그의 첫 시집 <시간이 멈추자 나는 날았다>는 이런 현실을 반영하면서도 이탈하려는 에너지로 음울하고도 발랄했다. 시간은 저절로 멈춘 것이 아니라 시인이 멈추게 한 것이었고, 시간이 멈춘 시간에 시인은 날 수 있는 능력과 공간을 얻었다. 없음을 있음으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상상과 환상의 힘에 의해서였다.

상상과 환상이 통치하는 무시간의 시간에 현실의 중력은 사라지며, 그 세계에서 ‘나’는 어떤 제약도 없이 모든 열망을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김참이 환상의 세계로 날아간 것은 현실의 중력에서는 벗어나되 현실의 문제들을 그대로 껴안은 채였다. 김참의 환상은 현실을 가볍게 넘어서되 현실성을 잃지 않았으며 잃지 못했다. 그의 환상은 현실에 기반을 둔 상상과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환상의 영토에까지 현실성을 물들임으로써 김참은 시인이 되었다. 반대의 진술 역시 참이다. 김참은 피폐한 현실에 환상을 물들이면서 다른 빛깔과 형태의 세상을 열 수 있기를 소망했다. 이 소망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를 모르지 않았으나(않았기에) 그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김참의 환상은 더 감각적이고 현실적인 것이 되었다. 그의 집에는 현재 “귀가 넷 달린 수백 마리 회색 거미들”이 살고 있다. 실제의 거미들이 환상의 통로를 거쳐 현실과 비현실이 중첩된 거미로 화했기 때문이다. “집 곳곳”을 장악한 “배고픈 거미”들은 “내 발톱을 갉아먹고” “내 귓속에 누워 꿈을 꾸며” “내 귓속에 하얀 알을 낳는다”. 거미의 소임은 단 한 가지,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것이다. 거미들은 무럭무럭 자라고 ‘나’는 조금씩 야위어간다.

매일 “내 살을 파먹고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거미’는 무엇인가? 생업, 생활, 부양해야 할 가족, ‘나’를 살게 하는 동시에 옥죄는 현실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나’를 파먹으며 자라는 ‘나’의 자의식이나, 하루하루 죽어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삶’ 자체의 상징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김참의 환상은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느끼고 생각하기 위한 장치다. 그는 지금 이 장치를 일상의 구석진 곳에까지 꼼꼼히 설치한다. 현실을 가리는 장막이 아니라 현실의 맨얼굴을 보게 하는 환상.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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