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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계절을 사는 동안

등록 2016-12-30 19:29수정 2016-12-30 21:08

[토요판] 이 주의 시인,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 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수록

간밤, 그 기나긴 겨울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셨다. 내가 일을 보고 있는 단체의 지회장단 회의를 마치고 통음을 한 것이다. 막차는 후배 시인의 집이었다.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해장 겸 반주를 하고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려는 와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호호당 선생이었다. 황동규 시인의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을 읽다가 문득 내 생각이 났다고 한다. 워즈워스, 김소월, 황동규 시인을 좋아하는 선생은 언제부턴가 그다음 자리에 안아무개 시인을 꼽는다. 과분한 일이지만 오늘도 그랬다. 게다가 해설까지 곁들였다. 황동규 시인의 시는 넓고 안아무개 시인은 좁다는 말씀이었다. 좁다는 것은 글을 쓰는 의도가 분명하고 가까워서 간절함이 느껴져서 좋다는 뜻이라고 부연설명했다.

전화를 끊고 나는 황동규 시인의 시 ‘즐거운 편지’를 생각했다. 오래전 자주 읊조리던 시. 자동기술인 양 달싹이며 흘러나왔다. “내 사랑도 어디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의 그 ‘반드시’에 방점이 있다는 시인의 말도 떠오른다. 사랑의 영원성을 믿는 종교적인 관점과는 달리 인간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다분히 실존적 사랑관. 거기에다가 자연의 영원 순환성을 대비시켜 비극의 극치미를 버무려낸 시. 낭송을 하는 동안은 해와 달이 무수하게 넘나드는 듯하고, 눈과 비가 섞바뀌며 내리퍼붓기는 끝이 없는 듯하고, 계절이 쉼 없이 오고 가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읊조리고 있자면 가히 시공을 넘나드는 넓이가 아득하기까지 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에 비하면 내 시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는 좁다. 폭넓은 대비가 없다. 제목의 느낌에 충실하게 따라가고 있을 뿐이다. 확장이 아니라 집중이고, 분방이 아니라 외곬이다. 시도 주인 닮았다. 같은 해와 달,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을 노래해도 이리 다르다. 호호당 선생 덕분에 내 시를 다시 되새김질하면서 좁음의 의미를 깨닫고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큰 발견이었다. 감사할 일이다.

이 시에서 알 수 있듯이 나는 자연 순환의 선상에 삶을 놓고 보는 습성이 있다. 우리의 삶도 자연의 일부이고 일체라는 생각이 바탕이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인류는 자연과 다를 바 없어서 영원 순환을 착실히 이어가고 있다. 내 시는 좁지만 이런 의미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지구상 어디에도 늘 같은 기후와 계절이 유지되는 곳은 없다. 모든 생명체는 변화에 맞게 살아간다. 60년짜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의 삶도 사계절이 있다. 기승전결, 생로병사와 같은 봄-여름-가을-겨울을 이어간다.

내 인생에도 겨울 같은 시절이 있었다. 청춘 시절, 그땐 몰랐지만 말이다. 이 시는 그야말로 ‘철’도 모르고 헤매던 그 시절의 나를 반성하며 쓴 것이다. 집착의 반대말이 해탈인 줄도 모르고 앙탈을 부리던 시절, 겨울인 줄도 모르고 맨발로 쏘다닌 청맹과니나 다를 바 없던 그 모든 행위에 대한 반성문이다. 그 시절이 겨울인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아랫목에서 이불 덮어쓰고 고구마나 깎아 먹으며 봄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삽날도 보습도 먹지 않는 얼어붙은 대지를 갈아엎으려고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언 땅에 씨를 뿌리는 무모한 짓 또한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절 따라 살았을 것이다. 피는 끓고 몸은 팔팔하지만 현실의 삶은 겨울 같았다고 해도 그 간극이 그렇게까지 섭섭하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오히려 그러했기 때문에 더 겨울이었다는, 겨울과도 같은 삶이었다는 생각 또한 지울 수 없지만 말이다.

삶이란 몸 따로, 마음 따로, 세상 따로 어긋나서 돌아가는 시절이 반드시 있다. 60년을 채운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런 시절이 겨울이다. 때가 지나가면 봄이 온다. 반드시 겨울을 거쳐야만 봄을 맞이할 수 있다. 겨울 석 달을 반드시 지내야 봄이 오듯 인생에도 그런 겨울이 있다. 60갑자를 네 계절로 나누면 15년 정도 된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다.

바야흐로 때는 동지를 지내고 있는 중이다. 비록 팥죽이라는 절식은 구경도 못했지만 절기의 느낌은 꼬박꼬박 챙겨본다. 하지부터 점차 줄어든 낮의 길이가 동지에 이르러서는 가장 짧아진다. 덕분에 가장 길어진 밤의 길이는 이때부터 차츰 짧아져서 하지가 되면 가장 절정에 이른다. 해는 그렇게 제 갈 길을 거의 정확하게 가고 오며, 오고 가며 나선형 반복 순환을 한다. 그 길을 일러 도(道)라고들 한다.

안상학 시인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그대 무사한가> <안동소주> <오래된 엽서> <아배 생각>, 시화집 <시의 꽃말을 읽다>, 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 등을 냈다.


그대와 나, 서로의 부재를 채우는 사랑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그 사람은 돌아왔고, ‘나’는 거기 없었다. 안상학은 지나온 삶의 깊은 회한을 이렇게 적는다. 그대가 돌아왔으나 나는 이미 떠났고, 그대가 거기 있었으나 나는 거기 없었다. 많은 시들이 떠나간 그대를 슬퍼하고 기억하거나, 돌아올(돌아온) 그대를 희망하고 환영하는 것과는 좀 다른 양상이다.

요점은 그대와 내가 같은 시점에 정반대의 서술어를 사용했다는 것. 그대와 ‘나’의 서술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시에서나 삶에서나 흔한 일이지만, 이처럼 정확히 엇갈리는 경우는 남은 생을 두고두고 통탄할 만큼 치명적인 것이다. 이 ‘시점의 배반’을, 그대와 나의 ‘서술어의 불일치’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그대와 나의 마음이 다른 것도, 그대와 내가 즐겨 쓰는 동사와 형용사들이 다른 것도 아닌 듯한데 말이다.

그대와 ‘나’는 같은 시점 다른 곳에 있고, 다른 시점 같은 곳에 있다. 그대와 나는 같은 시점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시점 같은 일을 한다. 이 정교하고 고독한 엇갈림 속에서 나는 그대가 떠난 자리에 있고, 그대는 내가 떠난 자리에 있다. 그대의 부재를 채우는 것은 나이지만, 나의 부재를 채우는 것은 그대다. 그렇지 않다면 그 많은 시들이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그 많은 노래들이 불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 많은 촛불들이 궤도를 지닌 별처럼 매주 거리를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이 헐겁고 아름다운 연대의 이름은 ‘사랑’이다. 안상학은 사랑의 시간과 장소가 일치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지만, 그의 슬픔은 이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질책으로 화한다. 나는 왜 그때 그곳에 있지 않았던가/못했던가. 자신을 질책하는 자는 그대의 부재가 아닌 나의 부재를 심문한다. 그대가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서술어를 사용하든 문제는 언제나 그 이상의 무엇이다. 핵심은 나의 부재를 ‘있음’과 ‘행위’로 바꾸는 것. 나의 위치와 행위를 조금 바꾸자 그대와 내가 이루고 있는 세상과 삶의 구조가 바뀐다. 2016년, 우리가 함께 행한 것은 이 작고도 거대한 위치 이동이며 구조 변경이다. 서로의 부재를 채우는 ‘사랑’이 있어 가능했던.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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