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허수경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
꽃이여, 네가 이 지상을 떠날 때 너를 바라보던 내 눈 속에
너는 있다
다람쥐여, 연인이여 네가 바삐 겨울 양식을 위하여 도심의 찻길을 건너다 차에 치일 때
바라보던 내 눈 안에 경악하던 내 눈 안에
너는 있다
저녁 퇴근길 밀려오던 차 안에서 고래고래 혼자 고함을 치던 너의 입안에서
피던 꽃들이 고개를 낮추고 죽어갈 때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달려가다 싣고 가던
얼어붙은 명태들을 다 쏟아내고 나자빠져 있던 대형 화물차의
하늘로 향한 바퀴 속에 명태의 눈 안에
나는 있다
나는 그렇게 있다 미친 듯 타들어가던 도시 주변의 산림 속에
오래된 과거의 마을을 살아가던 내일이면 도살될 돼지의 검은 털 속에
바다를 건너오던 열대과일과 바다 저편에 아직도 푸르고도 너른 잎을 가진
과일의 어미들 그 흔들거리던 혈관 속에
나는 있다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리며 뻘게를 찾는 바닷가
작은 남자와 그 아이들의 눈 속에 나는 있다 해마다
오는 해일과 홍수 속에 뻘밭과 파괴 속에
검은 물소가 건너가는 수렁 속에
과거에도 내 눈은 그곳에 있었고
과거에도 너의 눈은 내 눈 속에 있어서
우리의 여관인 자연은 우리들의 눈으로
땅 밑에 물 밑에 어두운 등불을 켜두었다
컴컴한 곳에서 아주 작은 빛이 나올 때
너의 눈빛 그 속에 나는 있다
미약한 약속의 생이었다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었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문학동네, 2011)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시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오어는 현대시 입문서 <아름답고 무의미한>(Beautiful & Pointless·하퍼콜린스, 2011)에서 자신이 시에 처음 흥미를 느끼게 된 계기를 회상한다. 시는 수업 시간에나 견디며 읽는 것일 뿐이라고 믿던 한 대학생의 선입견을 무너뜨린 것은 2학년 2학기 교양 영문학 수업 시간에 읽은 필립 라킨의 시 ‘물’(water)이었다고 한다. “내가 소명을 받아/ 종교 하나를 일으켜야 한다면/ 물을 사용해야만 하리”로 시작되고 “그리고 나는 동쪽에서/ 한 컵의 물을 들어 올려야 한다/ 거기로 어떤 각도의 빛이건/ 끝없이 모여들리라”로 끝나는 시다. 그는 놀랐다. 이렇게 무뚝뚝한 말투로 이렇게 얼떨떨한 깊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그 후 청년 오어는 라킨의 모든 시를 읽었다. 라킨에 대한 책과 라킨이 높이 평가한 시인들까지 모조리 읽었다. 그렇게 그는 한 명의 ‘시 독자’가 되었다. 방금 이 문장을 나는 ‘그렇게 한 사람의 시 독자가 발생했다’라고 적을 수도 있다. 감염자가 발견되었을 때 뉴스에서 말하듯이 말이다. 시를 읽는 사람과 안 읽는 사람 사이에는 꽤 확연한 선이 그어져 있다. 그런데 누군가가 어떤 시 한 편에 감전되어 그 선을 넘어간다. ‘시 안 읽던 사람’이, 어느 순간, ‘시 읽는 사람’이 된다. 시 독자의 ‘발생’ 현장이다.(시 독자로서의 나는 중학생이었던 1989~1990년 무렵에 발생했다. 당대의 베스트셀러 시집 <홀로서기>를 읽고서였다.)
그렇다면 이제 물어볼 수 있다. ‘시인은 어떻게 발생하는가?’ 이럴 때 인용하기 좋은 것은 역시 파블로 네루다의 작품 ‘시’이겠고(“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날 찾아왔다.”) 나 역시 이 시를 좋아하지만 이 시를 둘러싸고 있는 다정한 신비주의까지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시인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신비주의도 품고 있지 않다. 내가 아는 훌륭한 시인들은 타고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그저 노력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필사적인 노력에 신비로운 것이라고는 없다. 노력이란 시도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다시 실패하는 처절한 세속의 일이다. 조금도 신비롭지 않은 그 노동이 멈추는 순간, 이미 발생한 시인도 함께 소멸된다.
내가 존경하는 시인들은 어떤 식으로건 존재에 대한 폭력과 싸운다. 특히 언어와 함께 그러기를 원한다. 그들은 극소량의 폭력성도 함유하고 있지 않은 언어에 도달하여 그로써 세계의 폭력성을 드러내려고 한다. 자주 오해되지만 그런 비폭력적인 언어가 순한 단어와 예쁜 표현들로 달성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어떤 시선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그런 시선을 가능케 하는 어떤 자리에 설 때 생겨난다. 그리고 그럴 때 시인은 발생하는 것이다. 허수경의 다섯 번째 시집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은 21세기에 출간된 한국어 시집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서너 권 중 하나라고 나는 믿는데, 이 시집에 수록된 위의 시가 시인의 발생 조건을 아름답게 설명해낸다.
1연은 “나는 그렇게 있다 너의 눈 속에”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1연이 실제로 하는 말은 그 반대다. 네 눈 속에 내가 있다는 말 말고, 내 눈 속에 네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보는 것이 먼저라는 것이다. 시간이 사물을 살해하는 순간 중 하나인 꽃의 죽음을 보아야 하고, 다른 다람쥐의 연인일 어느 다람쥐가 양식을 구하러 나왔다가 인간의 차에 치여 죽는 순간을 보아야 한다. 그때 나의 눈은 ‘경악하는 눈’이다. 세상의 ‘사소한’ 죽음을 경악하며 바라보는 일에서 시에 관한 모든 것이 출발한다.
2연에서 나의 눈이 보는 것은 인간의 교통사고다. 차 안에서 혼자 고함을 치는 사람이 있다. 그의 말이 피울 수 있었을지도 모를 꽃들이 그의 분노 때문에 고개를 낮추고 죽어간다. 내용을 알 수 없는 그의 분노는 세상에 전달되지 못한 채 차 안에 갇혀 있다. 그는 고된 노동에 정당한 대가를 못 받고 있는 운송 노동자일까. 이 트럭은 “고속도로를 달려가다 달려가다” 기어이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시인은 이 현장 역시 경악의 눈으로 보고 있는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여기서는 1연과 달리, 내가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보는 것으로 쓰여 있다는 점이다. “하늘로 향한 바퀴 속에 명태의 눈 안에/나는 있다.”
1연과 2연 사이에는 어떤 중요한 단계 하나가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너를’ 보는 것이 먼저이고(1연) ‘네가 나를’ 보는 것은 그다음(2연)이라는 것. 내가 너를 본다고 해서 반드시 네가 나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너를 볼 때, 내 안에 무언가가 움직여서 내가 너에게 어떤 책임을 느끼게 될 때, 그때 주체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내가 너를 볼 때 오히려 네가 나를 보고 있다, 라고. 너의 시선 앞에서 나는 도망갈 데가 없다. 이 피동형 표현 안에서 주체는 대상에 종속돼 있다. 이 종속의 자리에 기꺼이 선다는 것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목격자(증인)로서의 운명을 수락한다는 것이다.
3연은 호흡이 급해진다. 증인 출석 요구서가 곳곳에서 날아오고 시인은 거기에 일일이 응답한다. 불타는 숲, 도살되는 돼지, 강제 이주된 과일들(이국에 살고 있을 “과일의 어미”를 생각하고 그 나무의 “혈관”까지를 생각하는 허수경의 윤리적 상상력은 놀랍다), 파괴되는 개펄, 수렁에 빠진 물소… 이 모든 죽어가는 것들이 시인을 본다. 이를 문답으로 바꾸면 이렇다. ‘시인은 어디에 있는가? 모든 죽어가는 것들의 마지막 눈 속에 있다.’ 이어지는 마지막 4연에서 죽어가는 너의 눈과 증언하는 나의 눈은 하나로 포개진다. 이 세상을 살려야 한다는 “실핏줄처럼 가는 약속의 등불”이 꺼지지 않으려면 시인이라는 존재가 끊임없이 발생해야 한다는 듯이.
데이비드 오어의 재미있는 보고에 따르면,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like)’와 ‘나는 X를 사랑한다(love)’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 보면, 대체로 ‘좋아한다’가 ‘사랑한다’보다 더 많다고 한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는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세 배나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나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부기 : 지난 1년간 ‘격주시화’를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