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굴다리 헌책방
용산선은 용산역을 출발해 가좌역에서 경의선(서울~신의주)과 만나는 짧은 철길이다. 지금 그 길은 레일과 침목이 걷히고 굴착기들이 동원돼 파헤쳐지고 있다. 그 길에는 인천국제공항철도와 경의선이 지하로 놓일 예정이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두 철길은 각각 지하 1, 2층으로 높이를 달리하여 달리다가 현재 가좌역 직전에서 갈라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30년 전부터 기차소리를 배경음으로 들어온 마포구 공덕동 굴다리 헌책방(02-706-2338)은 이제 굴착기와 덤프트럭의 소음 가운데 있다. 이 소음이 2009년 말에 끝나면 지상은 공원으로 조성될 듯하다. 그렇게 되면 전혀 새로운 환경에 맞춰 인간 생태계가 새로 조성되지 않겠는가. 책방 주인 양연배(66)씨는 그것을 지레 걱정하지 않는다.
변신 중인 용산선 옆은 철마의 소음과 진동 탓에 독특한 풍경을 띠어왔다. 작은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오랫동안 지친 어깨를 기대어 왔다. 거기에는 불편을 감내할 용의가 있는 영세민들이 살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업종이 자리잡았다. 사람이 모일 만한 곳은 안주가 푸짐한 대폿집이 들어서고, 한갓진 곳은 점집이 들어섰다. 대포가 지친 육신을 위로한다면 점장이는 미래의 불안을 달래 주었다.
굴다리 헌책방은 상호가 없다. ‘헌책 사고팝니다’라는 메시지와 전화번호가 붙어 있을 뿐, 현재의 호칭은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따름이다. 철길을 마주한 책방은 오른쪽으로 네개의 음식점을 거느리고 있다. 돼지껍데기를 안주로 하는 소주와 막걸리가 주메뉴다. 거느리고 있다고 표현했거니, 그것은 낮동안에만 유효하다. 가난한 월급장이들이 하루일을 마치고 모여들어 흥성스런 술판을 벌이면 책방은 음식점의 끝에 붙어 그 존재가 가뭇해진다.
오후 4시. 철길 공사장에는 네팔에서 온 듯한 이주노동자가 경광봉을 들고 경비를 서고, 책방 옆 음식점 앞에서는 담배를 꼬나문 남정네가 숯불을 피웠다. 기찻길 옆 동네가 깨어나는 시각. 책방주인 양씨는 오랫만에 양복차림이다. 친척 결혼식에 갈 참으로 잠시 들렀을 뿐이다. 평소 즐기던 북과 채가 동글의자에 얌전히 뉘어 있다.
양씨가 헌책방을 차린 것은 열아홉 살 1958년 여름. 아버지를 졸라 논 판 돈으로 동대문백화점 앞 경전 담벼락에서 헌책방을 열었다. 대학천변, 아현동 삼거리 등을 거쳐 여기서만도 30년이다. 책이 없어 못팔던 때는 이제 기억에만 존재한다. 책방은 전방후원형. 입구에 새부리처럼 책들이 삐죽이 나와 있고 문을 열고 들어서면 양쪽이 책벽이다. 세 발자국 정도 ‘전방’ 통로를 지나면 ‘후원’에 주인 양씨가 책을 두른 채 북채를 잡고 있다. 전기난로의 따스함 범위만큼이나 움직이는 책의 범위도 좁다.
2시께 문을 열어 자리를 지키다가 7~8시가 되면 양씨는 ‘마나님’이 운영하는 음식점 장수갈매기로 자리를 옮겨 손님 시중을 든다. 책손님이 오면 달려와 잠시 책방주인으로 변신한다. 매출은 음식점에 비하면 ‘새발의 피’. 그래도 책방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책방이 곧 그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볼 만한 책이 있어야 말이지.” 남들이 비웃고 간다면서 절대 소개하지 말라고 했다. <신라금속공예연구> <의방유취> 1~5권(4권 없음), <향약집성방>이 눈에 띈다. 아무렴 책 없는 책방이 있을까.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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