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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어지럽게 쌓인 ‘괜찮은’ 책들 한번 쓱 보는데도 30분 걸려

등록 2005-12-22 19:43수정 2006-02-06 20:57

헌책방 순례/의정부 헌책백화점

컴퓨터 모니터는 영롱한 꽃을 한없이 피워 올렸다. 의정부 헌책백화점(031-876-6231) 주인 김용석(54)씨의 겨울나기다. 여름부터 시작한 꽃 사진. 그의 가슴에는 훈장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걸렸다.

“사람을 찍으면 시비가 일지만 꽃은 그렇지 않아요.”

의정부 고교생 몇이서 책을 안고 나갔다. 조금 뒤 벙거지에 외투로 무장한 사내가 들어왔다. 자전거로 한 시간 걸려 상계동에서 왔다는 그는 ‘이삭줍기’를 한다며 책장 속으로 스며들었다. 다음, 의정부 여고생 둘이 참고서를 팔러왔다. “주는 대로 받아라.” 자연스럽게 말을 주고받고 천원짜리 몇장을 들고 나갔다.

3~4년 전에 두 군데가 없어지고 부근에서 유일하게 남은 헌책방. 이곳은 학생들의 발길이 잦다. 학기 초와 말은 그야말로 학생들이 큰 손님이다. 서울과는 달리 학생들이 헌책으로 공부하기를 스스럼없어 하고 학기가 끝나면 팔기도 주저하지 않는다. 의정부스런 표정 아닐까.

헌책백화점은 2000년 10월 이곳 28평 지하실에 둥지를 틀었다. 95년 가능초등학교 앞에서 시작해 헌책방 10년 이력이다. 가재울이 증발해 땅이름으로만 남고, 의정부여고 정문이 후문으로 뒤바뀌는 동안 의정부 헌책책화점은 이 지역 헌책방 대명사로 자리를 굳혔다.

학생용 책은 안쪽에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있고 나머지 책들은 대충대충 꽂히고 쌓였다. 대부분의 책꽂이 사이는 한 사람이 옆걸음으로 지나야 하고 어떤 데는 책이 덧쌓였기도 하지만 바닥에 책이 흩어져 차마 발을 디밀 수 없다. “내 죄가 큽니다. 책만 모으려고 했지, 제대로 정리를 못 했어요.” 한번 쓱 둘러보는 데도 30분은 족히 걸린다. 성마른 눈길에 <황진이>(유주현, 범서출판사, 1982) <향가 고전소설 관계 논저목록>(화경고전문학연구회 편, 단국대 출판부, 1993)이 잡힐 뿐이다. 고서를 따로 보관한다는 방에는 <한국현대소설이론자료집> 40권 완질이 꽂혀있다. 언뜻 보아 몹시 어지러운 계단 아래 공간에는 ‘괜찮은’ 책을 되는 대로 던져두었단다.


“어디 무슨 책이 있는지 잘 몰라요.” 책이 많은 것만큼은 자부한다는 그한테 책의 위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중·고교생 외의 손님들은 이름으로 책을 찾을 게 아니라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보물’을 건져야 한다. 그래서일까. 가격도 낮다. 정가 7천원 이하는 2천원, 7천~9천원 3천원. 9천~1만2천원은 4천원이다. 순 의정부식이다. 미군부대가 있어 영어책이 있을까 했으나 전혀 상관없다고 말했다. 원서는 얼마 되지 않았고 낡은 앤 라이스가 눈에 띄었다. 몇마디 더 묻고자 주인의 자리 옆 동글의자에 앉았을 때 <개가 있는 따뜻한 골목>(김기찬, 중학당, 2000)이 보였다. 눈높이를 달리하면 보이는 게 다르지 않겠는가.

주인 김씨는 비닐봉지에 담아 책을 건네주면서 두 가지를 더 챙겼다. 비타민 알약과 책방스티커. 시간제로 책방일을 도와주는 김경진(26)씨는 주인 김씨가 학생들 사이에서 ‘쏠라씨 아저씨’로 통한다고 귀띔했다. 미혼인 주인은 학생들한테 책을 팔고사는 게 재밌다고 했다. 그가 사이버에서 키우는 꽃과 착한 의정부 학생들과 겹쳐 보였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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