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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눈길 끄는 쟁쟁한 역사자료 많아… 적자 메우려 중고 물품도 판매

등록 2005-12-29 19:00수정 2006-02-06 20:58

헌책방 순례/책나라

전철 회기역과 경희대 중간, 사거리에서 외대 쪽으로 20m쯤. 길 가에 옷, 등산화, 스키, 텔레비전 등 헌 물건들이 가격표를 달고 앉았다. 그것에 눈길을 주며 걷노라면 갑자기 책들이 길을 막는다. 헌책방 책나라(02-960-7484). 알록달록 촌스런 간판.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면 웬걸, 쟁쟁한 책들이 차렷자세다. 시골 초등학교 교실에 들어 가득한 서울내기들을 보는 기이함.

주인 김경희(51)씨는 <조선인의 나아갈 길>(현영섭, 녹기연맹판, 소화 13년 8쇄), <조선은 어떤 것인가>(다카마쓰 겐타로, 소화 16년), <뻗어나가는 조선>(지은이, 펴낸 날 미상) 등 일제 때 발행된 친일자료를 눈호삿감으로 내놨다.

“저기요, 중고 텔레비전은 잘 나오죠?” 텔레비전이 좋아보이는지 손님이 물었다. “물론이죠. 그런데, 안테나가 없어서 여기서는 켜 봐도 알 수 없어요.”

현영섭. 일본인보다 더 극렬한 일본주의자. 조선 민족을 일본 민족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던 인물. 중추원 참의를 지낸 그의 아비 현헌에 이은 골수 친일파다. <조선의 나아길 길>은 그의 지론인 ‘내선일체’에 관한 글을 모은 작은 책. 1938년 1월 초판을 나와 일곱 달만에 11쇄를 찍었고 연말까지 1만권이 팔렸다니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근데, 채널이 몇 개나 나와요?” “웬만큼 나올 거요. 여관에서 쓰던 거거든요.”

맛뵈기 책들은 여의도, 강남 등 일제 때에 이어 잘 나가는 집에서 노인이 사망하거나 집안 전체가 이민을 가면서 흘러나온 책 가운데 몇몇 예다. 젊은이들이 ‘냄새나는’ 것을 정리하면서 족보는 물론 훈장, 사진 할 것 없이 할아버지 할머니의 흔적을 없애는 경우가 많다. 문화재의 옛모습 사진이 든 책자, 조선시대 한시집, 6·25 참전자료 등 소중한 자료가 되살려진 것은 순전히 눈밝은 헌책방 주인 덕이다. 3년 전부터는 책 외에 전자제품 등 중고 물품도 가져다가 필요한 사람들한테 공급한다. 요즘처럼 책장사가 잘 안될 때는 적자를 메워주는 효자라고 귀띔한다.

“3만원에서 좀 빼 주면 안 될까요?” “그러세요. 2만5천원만 주세요.” 텔레비전 가격표가 ‘팔렸음’ 쪽지로 바뀌었다.

그는 학생들이 책을 너무 멀리한다고 걱정이다. 한영사전을 사러온 한 학생이 한독사전을 집어들기에 알고보니 한자를 모르더란다. <동아원색대백과> 30권을 5만원에 내놓은 지 한달이 지났다. 그래도 일요일마다 자녀들 손잡고 들르는 사람들이 있고 홍천 등지에서 찾아오는 분들이 있어 힘이 난다. 마침 창쪽 난로 앞에서 얼굴이 달궈진 학생이 약속시간의 자투리를 이용해 소설책에 빠져 있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바닥, 전신거울이 달린 칸막이. 옷가게 흔적을 그대로 둔 것이나 통로 중간에 책꽂이를 올려 한뼘 허튼 곳 없이 ‘괜찮은’ 책으로 깔끔하게 꽂은 것이나 주인의 품성 그대로다. 8평 좁은 공간은 10평으로 소개해 달라는 주인의 말을 그대로 따라도 좋을 만큼 넓다. 한두 달 거르면 책이 완전히 바뀌어 손님들이 낯설어 한다는 자랑이다. 안주인이 ‘마당쇠’라 부르는 바깥주인이 이런 책도 있다면서 슬그머니 가져왔다. 포장도 뜯지않은 <광주이씨가 승정원 사초>(서울역사박물관 펴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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