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 순례/천지서적
오후 3시30분 성동구 뚝섬 천지서적(02-469-2107). 손전화 번호가 적힌 ‘식사중’이란 쪽지가 유리문 안쪽에 걸린 채 문은 잠겼고 밖에는 굳이 집어가지 않을 책과 비디오 무더기가 헌책방을 지켰다. 간판에는 옛날돈, 우표 판매는 물론 열쇠복사, 닫힌 문 출장수리도 한다고 되어 있다. 전월세방과 연락처가 쓰인 종이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은 잡식성인 듯하다. 전화를 하고 15분 동안 주변을 완전정복 하고서야 나타난 주인 변희대(52)씨는 식사 뒤 입을 부신 흔적이 없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에는 역시 미안해 하는 느낌이 없었다.
“바람 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다니는 게 인생이지요.”
기다리면서 엿본 대로 책방 안은 한치 어긋남 없이 정돈돼 있다. 책꽂이에는 수필, 소설, 실용서, 참고서, 각종 수험서 등이 분야별로 꽂혀있고, 군데군데 키를 넘는 책탑들은 바닥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자로 재며 쌓은 듯하다. 미로같은 책 사이를 서너 바퀴 돌도록 눈에 띄는 책은 없고, 주인은 문 근처, 주렁주렁 달린 복제용 열쇠꾸러미판 옆에서 알듯말듯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자꾸 곁가지를 쳤지만 주인 변씨의 자초지종은 이렇다.
12살 무렵 부산에서 가출 상경. 처음에는 구걸로 연명하다가 성수동, 천호동, 금호동 일대 요꼬공장을 전전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 17살 무렵 청계천 시장에서 헌책장수가 책을 사고파는 것을 보고 흥미가 일었다. 책방주인한테 통사정을 해 장사이치를 배워 리어카로 잡지를 팔았다. 그러다 뚝섬 경일초등학교 후문 근처 가정집을 사글세로 얻어 헌책과 고물장사를 했다. 짭잘했다. 하지만 “헝아들이 줘패고 돈을 빼뜰어가고” 때로는 문을 부수고 물건을 가져갔다. 나이 들면서 차츰 자리가 잡혔고 돈도 모였다. 서른 살에 “뿅갈 만큼 글씨를 잘 쓰는” 처자와 결혼했다. 그렇게 헌책방 35년. 버젓한 점포, 단독주택에 장성한 두 아들이 있다.
손님이 와서 얘기가 끊긴 틈. 천장에 붙여진 ‘천지서적 지하 40평’이란 쪽지가 눈에 들어왔다. 3~4년 전 월세부담에 방을 빼고 책을 파짓간으로 실어보내기 전 지하매장을 겸했던 시절의 자취다. 13년 전에는 아내가 세상을 떴다. 세든 점포가 재건축으로 헐리면서 부평으로 이사했던 게 화근. 아내는 당구장을 열고 자신은 과일야채 행상을 했다. 소개받을 때 북적이던 당구장은 인수하자마자 손님이 뚝 끊겼다. 사기였다. 돈과 함께 아내도 잃었고 상경해 다시 시작한 책방은 사글세였다. 작년에는 두 아들과 오순도순 살 꿈에 거처는 옥탑방일 망정 전세 끼고 단독주택을 샀다. 군대로, 시설로 두 아들이 떠나고 자신은 전기장판과 이불을 옮겨와 책방 뒤 골방에 기거하는 마당. 20년 된 건물은 자꾸 손을 벌리고 자신은 집을 관리하는 머슴이다. 복덕방에 속았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 해는 짧아 6시를 넘자 어두워졌다. “오늘은 손님 것 두 권을 포함해 14000원어치를 팔았어요.” 김밥 한줄, 붕어빵 몇 개, 개업점포의 부침개, 커피 석잔. “모이가 뵈면 후르륵 날아와 쪼아먹는 참새처럼” 그가 오늘 먹은 것의 전부다. 아들들한테는 차마 이런 말을 못한다. “아까도 사실은 점포를 알아보려 이야기하던 중이었어요.” 음식장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 “책은 공짜로 줘도 집어던지는 사람이 있지만 밥은 안 먹고는 못 살잖아요.” 4월이면 헌책방 또하나가 없어진다.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연재헌책방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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