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동물보호연합 등 동물보호단체들이 21일 서울 여의도 한국방송 본관 앞에서 드라마 <태종 이방원> 동물학대 규탄 기자회견을 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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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최대치(최재성)는 끔찍한 허기와 피로를 참으며 정글을 빠져나와 바모(미얀마와 중국의 접경지대)까지 나온다. 피골이 상접한 채 걷다가 쓰러진 대치의 눈에, 저기 들판을 기어가는 뱀이 한마리 보인다. 낮은 포복으로 기어간 대치는 떨리는 손으로 뱀을 덥석 잡아 든다. 있는 힘을 다해 뱀의 몸뚱아리에서 껍질을 벗겨낸 뒤, 아직도 꿈틀거리는 뱀을 단단히 손에 쥐고는 허리부터 생으로 으적으적 씹어 먹는 대치의 안광이 번뜩인다. <문화방송>(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1991~1992) 속 한 장면이다.
생각해 보면 그 장면은 내용 전개상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필수 불가결의 요소도 아니었다. 그저 대치가 얼마나 극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강조하기 위해 들어간, 정서적인 방점을 찍기 위한 장면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방점은 제대로 찍혀서, 해당 장면이 방영된 다음날 사람들은 “최재성이 뱀 뜯어 먹는 거 봤냐?”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언론은 최재성이 그 장면을 연기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조명했다. 도저히 할 엄두가 안 나서 망설이다가, 이틀간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버텨 정신이 몽롱해진 틈을 타 한 큐에 해치워버렸다는 이야기는 무용담처럼 회자됐다. 어린 내 눈에, 그 광경은 조금 이상해 보였다. 최재성이 그 장면을 찍기 위해 굉장히 고생한 건 알겠는데, 왜 아무도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지고 허리부터 물려서 죽어야 했던 뱀의 횡액은 이야기하지 않는가?
등장인물들의 처절한 생존기를 그린다는 이유로 <여명의 눈동자>가 괴롭힌 동물은 뱀만이 아니었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폭포 꼭대기에서 말과 함께 떨어지는 장면은 필리핀에서 촬영했는데, 특집 편성된 제작기 영상 <여명의 눈동자 이렇게 만들어졌다>는 그 장면을 어떻게 찍었는지 상세히 담고 있다. 스태프들은 힘들어하는 말을 뒤에서 밀고 앞에서 억지로 끌어가며 저 높은 폭포 꼭대기까지 끌고 올라간 뒤, 폭포 끄트머리에 버둥거리는 말을 눕혀서 붙잡아두고 있다가 사인에 맞춰 떨어뜨렸다. 말이 허공에서 버둥거리며 추락하는 장면을 네 차례나 보여주며, 제작기 영상의 내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완벽한 사전 준비, 그리고 몸을 던져서 연기하는 필리핀 스턴트맨들의 모습에 전 스태프들은 감사하고 감동했다.” 정작 스턴트맨이 입수하는 장면은 두차례밖에 안 보여줬으면서. 스펙터클을 과시하려고 말이 떨어지는 장면은 네차례나 보여줬으면서.
그나마 <여명의 눈동자>는 30여년 전 드라마이기라도 했다. 12년 전 방영된 <에스비에스>(SBS) 드라마 <커피하우스>(2010)에는 갓 비서로 취직한 승연(함은정)이 ‘들고양이를 잡아오라’는 상사 진수(강지환)의 엉뚱한 지시를 수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장면이 나온다. 간신히 고양이를 얻긴 했지만 어딜 봐도 밖에서 고생하는 들고양이처럼 보이지는 않는 상황, 승연과 승연의 가족들은 고양이의 몸에 오물을 묻히고 이발기로 털을 듬성듬성 깎는다. 시청자들의 항의에 제작진은 “몸에 묻힌 오물은 고운 모래와 분장 재료”라고 해명했지만, 몸에 뭐가 묻으면 스트레스를 받아서 즉각 핥아서 씻어내는 고양이의 습성을 생각하면 ‘분장 재료’를 몸에 묻히는 것 또한 동물학대인 건 매한가지다. 제작진은 “동물학대 의도는 정말 없었지만 그렇게 보였다면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커피하우스>로부터 4년이 지난 2014년, <한국방송>(KBS) 드라마 <연애의 발견> 1회에는 한여름(정유미)이 길에서 주워온 토끼를 전 남자친구 강태하(문정혁)에게 떠넘기면서, 토끼를 목욕시키겠다고 샤워기로 등을 적시는 장면을 방영했다. 토끼는 태생적으로 물을 무서워하며, 귀에 물이 들어가면 건강에 치명적이기에 절대로 물로 목욕을 시켜서는 안 되는 동물이다. 시청자들이 ‘동물학대’라고 항의하자, 제작진은 “토끼를 물로 목욕시키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촬영한 장면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촬영했다. 그날 촬영한 토끼에게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해명하며 “토끼는 한여름과 강태하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 등장시킨 것이니 2회 방송을 보시고 오해나 논란이 풀리길 바란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이 애틋한 과거를 떠올릴 소재로 삼기 위해 살아 있는 토끼를 물로 적셨다는 결과는 바뀐 게 없는데, 이게 무슨 ‘오해’란 말인가?
다시 8년 뒤 한국방송 대하사극 <태종 이방원> 7화, 이지란(선동혁)과 함께 사냥을 나가던 이성계(김영철)는 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다. 이 장면을, 제작진은 말의 다리에 묶어둔 와이어를 잡아당겨 강제로 말을 넘어뜨리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말은 지면으로부터 90도 각도로 붕 떴다가 머리부터 고꾸라졌다. 목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진 말은 혼자 고통스레 버둥거렸다.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의 문제제기에 이어 시청자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한국방송은 이렇게 답했다. “매우 어려운 촬영”이니만큼 “며칠 전부터 혹시 발생할지 모를 사고에 대비해 준비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으나 “사고 직후 말이 스스로 일어났고 외견상 부상이 없다는 점을 확인”해서 말을 돌려보냈는데, 시청자들의 우려로 인해 확인해본 결과 “안타깝게도 촬영 후 1주일쯤 뒤에 말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노라고. 책임을 통감한다고. 그러나 안전장치라고 마련해 둔 구덩이에 고개를 쳐박고 고꾸라지는 말의 영상을 본 사람들이라면, 제작진이 대체 “며칠 전부터” 무슨 “준비하고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는지 의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을 위해 동물을 희생시키는 건 어디까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동물권을 엄격하게 지키며 완전한 비건 생활을 하는 사람의 인식과, 나처럼 간헐적으로 육식을 하는 사람의 인식의 간극은 분명 거대할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 동물을 학대하는 것이 정당화되어선 안 된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 않을까? 스스로 촬영에 수반되는 위험을 인지하고 동의했는지 의사를 확인할 방도가 없는 동물의 생명을 담보로 해가면서까지 촬영해야 하는 장면 같은 건 세상에 없다. 최재성이 뱀을 뜯어먹은 지 30여년이 지났다. 강산도 세 번은 넘게 변했을 텐데, 이제 그 정도의 합의는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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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