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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누구에게나 같은 객관적 ‘세계’란 없다

등록 2008-01-18 19:34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돈키호테’를 통해서 본 ‘세계’의 의미 (1)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1605년과 1615년 두 차례에 걸쳐 발표한 〈돈 키호테〉는 세계문학사상 가장 익살스러운 작품들 중 하나이며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직접 읽지 않은 사람들조차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간 알고 있다. 때문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작품의 내용이나 줄거리가 아니다. 그보다 이 익살스런 이야기를 현대 과학이나 철학의 주요한 이론들과 대응시켜볼 때 드러나는 흥미로운 결과들이다. 알다시피 돈 키호테는 에스파냐 시골의 몰락한 귀족이다. 경작지의 대부분을 팔아 기사들의 무용담이 적힌 소설책을 사 읽은 그는 자기도 그들처럼 모험을 찾아 세상을 떠도는 편력기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7월 어느 이른 새벽에 “자신이 늑장을 부릴수록 세상이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겠는가 하는 생각에 쫓겨” 서둘러 길을 떠난다. 그는 기사소설에 나오는 우스꽝스런 표현과 말투로 대화하고, 여관을 웅장한 성으로, 여관주인을 성주로 인식한다. 그에게는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이 “그가 읽어온 글들과 같은 모양새”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심지어 풍차를 거인으로 알고 싸움도 벌인다. 이렇듯 기상천외한 그의 언행들에 독자들은 포복절도하기 십상이지만 이쯤에서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돈 키호테를 일종의 광인으로 본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을 경우 “그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이다.

도움이 될 만한 흥미로운 이론들이 있다. 먼저 생물학에서 살펴보자. 20세기 전반에 활동한 독일의 생물학자 야코프 폰 윅스퀼은 오랫동안 동물의 행동에 대해 연구한 끝에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은 스스로 하나의 ‘가상세계’를 구성하여 산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의 〈생물에서 본 세계〉에 실린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이렇다. 빠르게 움직이는 버들붕어는 어떤 영상을 1초에 30회 이상 보여주지 않으면 인식하지 못한다. 반대로 달팽이는 1초에 3회 이하로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의 움직임만 알아볼 수 있고, 1초에 4회 이상 움직이는 물체는 고정된 것으로 본다. 때문에 버들붕어가 어린 송사리를 잡아먹는 것을 달팽이는 보지 못하고, 달팽이가 배춧잎을 갉아먹는 것도 버들붕어는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일들이 서로의 눈앞에서 벌어진다고 해도 말이다. 또 배추흰나비는 빨강색은 보지 못한다. 단지 노랑색에서 자외색까지를 본다. 그러나 호랑나비는 빨강색부터 자외색까지를 모두 인식한다. 따라서 6월의 정원을 날아다니는 호랑나비에게는 노란 장미와 빨간 장미가 피어 있다는 것이 ‘참’이지만, 함께 어우러져 날고 있는 배추흰나비에게는 노란 장미만이 있다는 것이 ‘참’이다.

이런 실험들을 통해 윅스퀼이 내린 결론은 단순하지만 놀랍다.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파악되는 하나의 ‘객관적 세계’란 아예 존재하지 않고, 오직 각각의 생물체가 구성하는 다양한 가상세계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윅스퀼은 이런 가상세계를 ‘환경세계’라고 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환경세계들 사이에는 어느 것이 ‘참’이거나 ‘거짓’이라고 판단할 기준이 전혀 없다. 따라서 각자의 인식은 그가 구성한 환경세계에 의한 해석일 뿐이다. 이를테면 들녘에 만발한 꽃은 아름다운 장식을 만들려는 소녀의 환경세계에서는 하나의 장식품이다. 하지만 꽃줄기를 이용하여 꽃 속에 있는 먹이들에게로 가려는 개미의 환경세계에서는 길이고, 꽃을 뜯어먹는 소의 환경세계에서는 먹이다. 오늘날 이런 생각은 인지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와 그의 동료들에게로 이어졌다. 그들도 ‘인지’는 주어진 외부 세계를 우리의 정신 안에 그대로 그려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 스스로의 삶에 적합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내놓는 작업’이라고 했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인지를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그 안에서 산다. 뿐만 아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우리의 삶이 다시 우리의 인지를 만든다. 순환한다는 말이다. 곧 우리는 ‘그렇게’ 인지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며 살고, 또 ‘그렇게’ 행동하며 살기 때문에 ‘그렇게’ 인지한다. 이 말을 마투라나는 “무릇 함이 곧 앎이며, 앎이 곧 함이다”라고 표현했다.


근래 유행하는 뇌과학이 도달한 결론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돈 키호테는 결코 미친 것이 아니다. 그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여 그 안에서 인식하고 행동하며 산 것이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가 구축한 세계가 현실과 동떨어진 ‘기사도 이야기’에 근거해 있다는 것뿐이다. 혹시 동물들의 세계 인식과 사람의 그것이 같을 수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어 소개하고 싶은 철학이론이 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규정한 ‘세계’에 대한 사유다. 운만 떼자면, 하이데거에게 있어서도 세계란 객관적·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다. 윅스퀼과 마투라나가 간파한 바와 같이 우리가 각자의 삶을 통해 보여주는 하나의 해석이며 풍경화이자 시다. 다음에 이어 살펴보자.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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