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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름 짓기는 실존적 세계를 향한 첫걸음

등록 2008-02-01 19:16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돈키호테’를 통해서 본 ‘세계’의 의미 (2)

돈 키호테는 광인일까?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하지만 아니라고 한다면 그가 하는 행동들 중에는 흥미로운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이름 짓기’이다. “자신의 명성을 높이고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 편력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돈 키호테에게는 필히 준비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었다. 갑옷과 종마와 사모하는 여인이다. 그는 우선 조상이 물려준 낡은 투구와 갑옷을 적당히 손질해서 걸치고 비쩍 마른 늙은 말을 마구간에서 끌어낸다. 그리고 그 말에게 어떤 이름을 붙일지 “장장 나흘 동안이나” 생각하다가 ‘로시난테’로 정한다. 그 다음 “다시 여드레를” 고민한 끝에 자신의 이름도 ‘돈 키호테 데 라만차’로 바꾼다. 남은 것은 사모하는 여인인데, 마침 마을 인근에 알돈사 로렌소라는 아리따운 농부 처녀가 살고 있었다. 돈 키호테는 그녀를 “마음속 연인”으로 삼고, 다시 여러 날 고심하여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편력기사로서 돈 키호테가 한 첫번째 일이다. 한데, 그는 왜 이렇게 이름 짓기에 골몰했을까?

모를 일이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름 짓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는 ‘엄마’, ‘아빠’, ‘맘마’와 같은 아주 소수의 이름으로 자신의 세계를 묘사한다. 그 밖에는 모두 ‘그거’나 ‘저거’이다. 그만큼 단순한데, 이것이 아이가 이해하고 구성한 아이의 세계다. 아이가 자라 더 많은 대상들을 이해할수록 차츰 더 많은 이름들이 아이의 세계로 편입된다. 그럼으로써 아이의 세계는 점차 세분화되고 복잡하게 구성된다. 이런 과정은 〈구약 성서〉에서 신이 각종 동물들을 아담에게 데려가 이름을 짓게 하는 것(창세기 2 : 19)에도 나타나 있다. 아담이 만물에게 차례로 이름을 지어 준 일은 그가 점차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 나가는 행위였다. 인간은 이렇듯 이름 짓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구성해 간다. 그렇다면 돈 키호테도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성하려고 새로운 이름 짓기를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연관하여 살펴볼 흥미로운 철학적 사유가 있다.

1927년 발표한 〈존재와 시간〉에서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내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의해 드러나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아는 것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자연은 관광 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관광지로 이해된다. 해변은 해수욕 가능성을 통해 해수욕장으로 이해되고, 산은 등산 가능성을 통해 우리에게 등산지로 이해된다. 또한 돌과 나무는 건축 가능성을 통해 석재 또는 목재로 이해되고, 식물의 열매들은 식용 가능성을 통해 곡식 또는 과일로 이해된다. 이렇게 우리는 대상을 그 자체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인해 드러나는 자신의 가능성들을 통해 이해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이해란 우리가 대상에게 그 쓸모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의미화’ 작업이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의 이런 의미화 작업에 의해 ‘세계’가 태어난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세계’란 우리가 각각의 존재자들에게 그 쓸모에 따라 의미를 지시해주는 바탕이자, 우리가 구성한 의미의 그물망일 뿐이다. 같은 말을 하이데거는 “존재자를 쓸모라는 존재양식에서 만나게 하는 바탕, 곧 자기 지시적 이해가 행해지는 그곳이 다름 아닌 세계라는 현상이다”라고 표현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돈 키호테의 이름 짓기는 그의 새로운 세계 이해, 곧 편력기사라는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에 의한 새로운 세계 구성이 아니겠는가.

관련하여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우리의 이해에는 ‘본래적 이해’와 ‘비본래적 이해’가 있다고 한 하이데거의 말이다. 이 말은 곧 우리의 세계 구성에는 ‘본래적 구성’과 ‘비본래적 구성’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이데거에게 ‘본래적’이라는 용어는 인간이 ‘자기에게 주어진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그것을 향해 자기를 내던지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비본래적’이라는 용어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세상 사람들에게서 찾는 것을 말한다. 곧 세상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이해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사람이 본래적으로 사는 것을 ‘실존’이라 하고, 비본래적으로 사는 것을 ‘퇴락’이라 했다. 실존은 진정한 자기로 사는 것이고, 퇴락은 진정한 삶을 회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돈 키호테는 카뮈가 〈시지프의 신화〉에서 영웅적으로 묘사한 시지프 못지않게 ‘실존하는 인간’이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무관하게 편력기사라는 자신의 새로운 ‘존재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송두리째 내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이름 짓기는 실존을 향한 ‘의미 있는’ 첫걸음이었다. 조금 우스꽝스럽긴 하다. 하지만 시지프의 ‘바위 밀어 올리기’도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우습긴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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