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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이상은 변화를 부추기는 ‘영원한 꿈’

등록 2008-03-07 20:23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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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 돈키호테’를 통해서 본 ‘이상’의 의미 (2)

돈 키호테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는가? 아니다! 세 번째 원정에서 ‘백월의 기사’에게 패한 그는 풀이 죽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나는 불행하게도 그 구역 나는 기사담을 줄곧 읽어서 그만 그런 무지가 생겼던 거지. 이제야 나는 그것들이 무의미하고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단지 슬픈 것은 너무나도 뒤늦게 그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영혼을 밝혀줄 다른 책을 읽어서 그 보충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라고 한탄하며 임종을 맞는다. 그럼 그는 실패자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이상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달려 있다.

이상이란 본디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완전한 상태’지만 동시에 가장 ‘비현실적인 상태’다. 돈 키호테의 이상이기도 한 유토피아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곳’이지만 동시에 세상에는 전혀 ‘없는 곳’을 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실현과 연관해 볼 때 이상은 부정적이기도 긍정적이기도 하다. 이상을 비현실적 상태로 보면 그것은 한갓 ‘관념적 유희’이자 ‘정신적 아편’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그러나 이상을 완전한 상태라고 해석하면 그것은 변화를 촉구하게 하고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하게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이상은 ‘부단한’ 개혁의 원리이자 진보의 동력이다. 그런 만큼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이 유토피아주의를 포함한 모든 이상주의가 이데올로기와 다른 점이다.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보자. 프랑스 대혁명과 러시아 혁명의 역사적 의의가 크다고 할지라도 그 결과는 초기 혁명가들의 이상과 거리가 멀었다. 때문에 혁명이 완결되어감에 따라 ‘역설적으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유토피아 정신 내지 이상주의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이상주의는 언제나 당면한 현실적 불만과 결핍을 채우려는 인간의 ‘부단한’ 욕구와 충동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것에는 애초부터 출발점만 있을 뿐이지 종착점은 없다. 종착점을 확정한 이상주의는 오히려 진정한 이상주의가 아니다. 니콜라이 베르댜예프나 카를 포퍼가 이성과 진리를 억압하고 인권과 자유를 유린하는 전체주의의 일종으로 몰아붙인 ‘그’ 유토피아주의가 바로 종착점을 확정한 이상주의였다. 블로흐가 유토피아를 ‘아직 없는 것’, 곧 ‘미완성의 현실태’라고 규정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상이란 언제나 ‘아직은’ 실현되지 않음으로써 현실에 안주하려는 우리를 부추기고 불편하게 하고 변화하게 한다. 이것이 이상의 본래적 가치이며 역할이다. 따라서 진정한 이상주의자는 밤마다 희망을 쓸어안고 잠들고 아침마다 길 떠나는 자다. 그에게 실패란 없다. 그는 불사조다. 돈 키호테의 마지막 한탄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새롭다. 그는 자신의 이상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용했던 편력기사라는 방법이 나빴던 것을 후회했을 뿐이다. “다른 책을 읽어서 그 보충을 할 시간이 없다는 것”만을 슬퍼한 것이 그 증거다. 만일 그에게 시간이 더 허락되었다면 다른 방법으로 다시 도전하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돈 키호테는 실패한 자가 아니다. 또 실패할 수 있는 자도 아니다.

돈 키호테는 불사조가 되어 소설에서 세상으로 걸어 나왔다. 근대 이후 사람들은 더 나은 삶과 세상을 위해 싸우는 모든 현장에서, ‘입이 아니라 행동으로’ 투쟁하는 모든 이들의 모습에서 항상 돈 키호테를 보았다. 앞으로도 그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언제든 어디서든 다시 나타날 것이다. 개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좋은 사회란 없고 진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완전한 사회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고 외치며 총을 들고 싸워 “남미의 돈 키호테”로 불리던 체 게바라는 그의 ‘극단적’ 후예에 불과하다. 돈 키호테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숱하게 싸웠지만 오히려 폭력을 당하는 일이 많았고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그의 편력기사 원정은 체 게바라가 한 게릴라 투쟁보다는 간디, 마틴 루서 킹 등이 실행한 ‘시민불복종’이나 ‘직접행동’에 가깝다.

1997년 12월부터 1999년 12월까지, 무려 738일 동안 거대한 삼나무 위 지상 55미터나 되는 곳에 텐트를 치고 산 ‘우스꽝스런’ 사람이 있다.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줄리아 버터플라이 힐이다. 그럼으로써 그녀는 벌목회사로부터 그 삼나무를 지켜냈다. 나무에서 내려온 뒤에는 일회용품 사용을 금지하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다시 에콰도르로 갔다. 광활한 원시 상록수림을 훼손하는 송유관 공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성공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일어나 요구하면 할수록 세상은 더욱 좋아질 것입니다.” “한 사람이 변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돈 키호테는 지금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불편하게’ 부추기고 있다. 그러니 생각해보자.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를.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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