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보바리 부인’을 통해서 본 ‘욕망’의 의미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19세기에 발표된 가장 탁월한 불륜소설이다. 플로베르는 “보바리 부인, 그건 바로 나다”라고 고백했는데, 사람들은 이 말을 “보바리 부인, 그건 바로 우리다”라고 이해한다. 무슨 뜻일까? 줄거리는 간단하다. 사람은 좋지만 성공도 못 하고 취향마저 촌스러운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한 엠마는 곧바로 후회한다. 엠마는 사춘기 시절 읽었던 삼류 연애소설에 나오는 격정적 삶을 꿈꾸지만 현실은 권태롭기만 하다. 그래서 ‘과도한’ 사치를 시작하고 남자들과 불륜에 빠진다. 그러던 어느 날 빚 때문에 압류장이 날아들자 약을 먹고 자살한다. 빤한 이야기다. 따라서 소설 〈보바리 부인〉의 성공은 전적으로 작가 특유의 세련되고 섬세한 문장을 통해 묘사된 엠마의 ‘특별한’ 성격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당시 사람들은 여성에게는 성적 욕망이 전혀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엠마는 격렬한 성적 욕망을 갖고 그것을 충족시키는 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것이 엠마의 매력이다. 미국의 비평가 해럴드 블룸은 “플로베르의 이 걸작을 다시 읽을 때마다 계속해서 엠마 보바리에 탐닉하게 된다. 내게는 르누아르가 그린 누드를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심미적인 경험이다”라고 엠마를 추어올렸다. 엠마는 항상 하나 이상의 성적 대상이 자기 앞에 줄 서 있기를 꿈꾸었다. 성적으로도 ‘과도한’ 여성이다. 그럼에도 엠마는 오늘날 우리 모두의 성적 욕망을 대변한다. 모두가 엠마와 같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보바리 부인, 그건 바로 우리다”라는 말은 이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왜 엠마는 아니 우리는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이 ‘과도한’ 욕망을 갖는 것일까?
이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 하나를 우리는 근래 유행하는 진화생물학에서 들을 수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성적 욕망을 포함한 인간의 모든 욕망은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장구한 진화과정을 통해서 유전자 안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예컨대 검은머리박새의 암컷들은 대개 정절을 지키는 편이지만, 자기 배우자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다른 수컷이 나타나면 틈틈이 그와 짝짓기를 한다. 이런 현상은 엠마가 부유한 귀족 로돌프를 만나자 곧바로 불륜에 빠지는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 검은머리박새와 마찬가지로 엠마에게는※설사 엠마가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지라도※로돌프의 유전자가 남편의 유전자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속삭이며 난소를 자극하는 유전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수컷 흰눈썹울새는 목에 푸른빛이 도는데, 연구자들이 한 수컷의 목털에 스프레이를 뿌려 푸른색을 더욱 짙게 했더니, 갑자기 그의 주위에 암컷들이 몰려들어 짝짓기를 했다. 반대로 다른 수컷의 목털을 더 옅게 만들자, 그 수컷의 배우자까지도 다른 수컷을 찾아다녔다. 이런 현상은 엠마가 남편보다 젊고 잘생긴 변호사 레옹과 정사를 나누는 까닭을 쉽게 설명해준다. 흰눈썹울새와 마찬가지로 엠마의 유전자에도 성적 매력이 있는 상대와 섹스하고 싶은 욕망이 깊이 새겨져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욕망이란 단지 ‘유전자의 산물’일 뿐이다.
물론 다른 대답도 있다. 프랑스 문학평론가 르네 지라르가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서 주장한 소위 ‘욕망의 삼각형론’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주체-중개자-대상’이라는 삼각형 구조를 갖는다. 곧 ‘나’는 항상 ‘중개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한다. 그럼으로써 대상에 다가간다. 마치 기사소설을 읽고 진정한 편력기사가 되길 원하는 돈 키호테가 전설적인 기사 아마디스의 삶을 욕망하는 것과 같다. 파리 사교계를 열망하는 엠마는 연애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의 삶을 욕망한다. 그리고 그 여자들의 모든 것을 모방한다. ‘엠마-여주인공들-파리 사교계’라는 욕망의 삼각형이 형성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이란 단지 “타인을 따르는 욕망”으로서 ‘사회적 산물’에 불과하다.
문제는 욕망이 종종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폭군이라는 데에 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인간의 요구를 욕구와 욕망으로 구분했다. 예컨대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즐기기 위해 진귀한 음식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더위나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옷을 입으려는 것은 욕구이지만, 사치하기 위해 화려한 옷을 찾는 것은 욕망이다. 이처럼 욕구는 ‘생리적 요구’로서 노력하면 어떻게든 만족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욕망은 ‘정신적 요구’로서 어떻게 해도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엠마는 욕구를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채우려 했기 때문에 파멸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간단하다. 욕구는 채우되 욕망은 버려라! 좀 구태의연하지만 그래도 지혜다. “만약 네 자신에게 상을 주기를 원한다면, 육신의 욕망에서 정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첫째로 삼아라. 무엇을 위해 저잣거리를 헤매는가? 삶이란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고 긴 것도 아니다.” 세네카의 교훈이다.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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