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감독 등 영화인들이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 강행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왼쪽부터 배우 권병길씨, 정 감독, 채윤희 여성영화인모임 대표, 심재명 명필름 대표, 차승재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김조광수 청년필름 대표.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한-미FTA 쓰나미가 온다 ④ 입지 좁아진 방송·애니·영화
외국인 일반채널 투자한도 49%→100%
디즈니·폭스채널 등 한국 진출 본격화
‘정부 지원조차 소송감 될라’ 불안감도
외국인 일반채널 투자한도 49%→100%
디즈니·폭스채널 등 한국 진출 본격화
‘정부 지원조차 소송감 될라’ 불안감도
“가뜩이나 없는 집 곳간에서 더 빼앗아가는 격이죠.”
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표는 자조섞인 한숨을 뱉었다. 요즘 1억여원의 제작비가 들어간 30분 짜리 애니메이션 방송 납품가는 형편없는 수준이다. 지상파 방송사는 950여만원, 애니메이션 전문 케이블채널은 250만원 안팎, 어린이용 케이블채널은 100만원대다. 과거엔 방송사가 방송용 애니메이션의 일부 제작비를 지원했지만, 이젠 헐값 구입만 한다. “제작하는 순간 손해보는 구조”라는 애니메이션 업계는 더 곤궁해질 상황을 걱정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으로 국산 애니메이션의 케이블·위성채널 의무편성비율이 줄어드는 등 방송시장 개방 후폭풍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방송에 싼 값으로라도 판매할 ‘몫’마저 쪼그라들 처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되면, 방송시장 빗장이 풀리면서 미국 등 외국 프로그램이 밀려 들어와 중소 규모 콘텐츠 제작사들의 고통이 가중될 것이란 목소리가 높다. 미국산 콘텐츠의 쏠림현상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 방송시장 어떻게 열리나 협정 발효시점부터 3년이 지난 뒤, 외국인에게 보도·종합편성·홈쇼핑 채널을 뺀 일반 채널에 대한 간접 투자가 49%에서 100% 허용된다. 디즈니·폭스채널 등의 미국 유력 방송사업자들이 한국법인을 통해 본격 진출할 길이 열린다.
케이블·위성채널에서 국산 애니메이션 편성비율은 35%→30%, 한국영화는 25%→20%로 낮아진다. 한 국가의 수입물로 편성을 채울 수 있는 최대 비율도 60%→80%로 높아진다. 케이블채널에서 미국 프로그램이 더 넘쳐날 것을 예고하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2011년 방송산업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케이블 방송채널사용사업자(피피)들의 미국 프로그램 수입가는 8701만달러(약1000억원). 국내 프로그램의 미국 수출액은 79만달러에 그친다.
■ 시름 깊은 중소 제작사 케이블채널에서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하는 중소 피피들의 큰 피해가 예상된다. 개국을 앞둔 종편과의 경쟁도 버거운데 방송시장 개방으로 ‘미·드’(미국 드라마) ‘디즈니 애니’등이 더 거센 파고로 덮칠 경우 줄줄이 파산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박성호 개별피피발전연합회장은 “중소 피피들도 좋은 콘텐츠를 위해 공동 투자, 공동제작 등을 모색 중”이라며 “정부도 개별피피 보호조항의 현실화와 제작기금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송발전기금을 통한 제작비 지원이 지상파에 쏠려 있어 중소피피나 독립제작사로 오는 것은 미미하다고 지적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의 상실감도 크다. 이교정 한국애니메이션제작자협회 전무는 “방송 납품 단가 현실화 방안, 외국 작품과 경쟁할 수 있도록 작품의 질을 높이기 위한 정부 차원의 추가적인 지원책 보강 없이 비준안이 통과된 데 배반감도 느낀다”고 했다. 애니 업계는 새 출범하는 종편과 케이블채널에서도 재방송으로 의무편성비율을 채우는 편법이 아닌, 신규 애니메이션을 일정 수준 내보내는 ‘방송총량제 도입’ 등을 담은 방송법 개정안과 애니메이션진흥법의 조속한 국회 처리를 바라고 있다.
협정 선결조건으로 미국이 요구한 스크린쿼터(자국영화를 일정 기일 이상 의무상영하는 제도) 축소(146일→73일)가 2006년 이뤄진 뒤, 한국영화 관객점유율 상승세 둔화, 제작 양극화 등을 겪은 영화계도 2차 판권시장의 축소피해가 불가피하다. 문화체육관광부도 “케이블·위성채널에서 국내 영화 편성비율이 5% 낮아짐에 따라, 영화계에 연평균 26억원 피해가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 지원정책도 불공정 소송? 영화계에선 미국이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를 통해 애니메이션과 저예산영화 등에 대한 영화진흥위원회, 콘텐츠진흥원 등의 각종 지원제도가 불공정 거래라며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한다.
영화제작가협회 관계자는 “협정문 한글판을 보면, ‘영화진흥정책’이 ‘미래유보’(향후 규제를 강화하거나, 새 규제조처를 도입할 수 있는 분야)로 포함돼 정부가 영화진흥정책을 펼 수 있지만, 영문판엔 ‘영화진흥정책’을 ‘프로모션’(Promotion)으로 표현하고 있다”며 “미국이 ‘프로모션’을 진흥·지원정책이라고 포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문제를 삼을 경우 영화진흥위원회 등의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화부 쪽은 “정부가 한국영화와 애니에 투자 형식으로 지원금을 주는 것은 협정 위배가 아니며, ‘프로모션’이 (한국영화를 위한) 공공정책까지 포괄하는 것으로 협의됐기 때문에 걱정할 부분이 아니다”고 했다. 문현숙 선임기자 hyunsm@hani.co.kr
송호진 기자 dmzsong@hani.co.kr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점유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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