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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한국 록의 새 시대가 열리던 순간…위대했네, 꼭 그렇지 않았지만

등록 2016-01-15 19:46수정 2016-01-17 11:48

성기완의 노랫말 얄라셩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산울림(작사·작곡 김창완)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나무 사이 그녀 눈동자 신비한 빛을 발하고 있네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보얀 우윳빛 숲속은 꿈꾸는 듯 아련했어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우리 둘은 호숫가에 앉았지
나무처럼 싱그런 그날은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꼭 그렇진 않았지만 구름 위에 뜬 기분이었어

잎새 끝에 매달린 햇살 간지런 바람에 흩어져…’

오랜만에 산울림의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이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느낌을 향한 시간 여행이 시작된다. 그때처럼, 나는 이 노래에 빠져든다기보다는 풀려들어간다. 나의 귀와 이 노래의 혀는 서로 너무나 호흡이 잘 맞는 연인들의 그것들처럼 돌돌 잘도 감긴다. 아. 나는 이 노래를 사랑한다. 이 소리들의 흐름, 속삭임, 높낮이와 분절의 모든 것들을, 나는 단지 1%의 노력도 들이지 않고 100% 알고 있다. 실은 말하기도 전에 알아버린 느낌이다. 단어의 의미들은 거추장스러운 옷고름에 불과하다. 이 노래는 뜻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쾌적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전해준다. 그 누가 이 가사의 뜻풀이를 죽어라고 하랴. 해도 괜찮지만, 해도 헛수고다. 노래는 정신 깊은 곳에 그 노래의 기원과 만나는 매우 훌륭한 지도를 숨겨 놓는다. 그 지도는 의미의 지도가 아니라, 소리지도다. 사실 21세기는 소리지도의 세기다. 이쪽으로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할 거 같으니 이 얘기는 다음에.

이 노래와 함께 어떤 늦은 여름의 장면으로 거슬러 올라가려면 ‘ㄹ’의 음가를 오토바이 타듯 타야 한다(기타로 오도바일 타자). 오빠랑 ㄹ을 타고 한번 가볼까? ㄹ은 너를 데려가는 원동력이야. 발음해봐. ㄹ은 혀를 말아서 돌려야 발음되지? 느낌과 뜻을 회전시키지? 오빠 따라 해보자. 롹앤롤 Rock and Roll. 여기에는 ‘ㄹ’이 두 개나 있다. 롹앤롤의 거대한 역사를 출발시킨 노래 중의 하나가 척 베리의 ‘베토벤 위에서 굴러라’(Roll over Beethoven) 아니겠니. ㄹ은 록음악의 가장 중요한 발음이야. 롹-앤-롤.

‘그렇’, ‘구름’, ‘달린’ ‘간지런’, 이런 음소들이 두둥실, 나를 데려간다. 그러나 매끄러운 바퀴인 ‘ㄹ’만 있는 건 아니다. ‘았’, ‘었’, ‘끝’, ‘흩’ 등 딱딱한 발음의 음가들이, 주로 받침으로, ㄹ 주변에 아주 리드미컬하게 곧추서 있다. 이 발음들은 잘도 굴러가는 흐름에 굴곡과 긴장을 만드는 돌부리들이라 할 수 있다. 독자들도 그냥 눈으로 보지만 말고 리을의 부드러움과 경자음의 딱딱함, 풀림과 막힘을 직접 발음하면서 경험해보길 바란다.

자 그래서 넌 이 노래(김창완 오빠)와 더불어 어디로 가니. 호숫가의 벤치로 간다. 우리 둘이 앉았던 호숫가의 ‘보얀 우윳빛 숲속은 꿈꾸는 듯 아련했’던 것이다. 방금 거기 앉아서 첫키스를 하고 돌아온 아이한테 어른들이 묻는다.

‘너 어디 갔다 왔어?’

아이는 ‘저…’ 하고 고개를 숙인다. 아이는 진술을 거부한다. 꿈속의 아련함만이 보얀 두 볼에 흔적처럼 남아 있다. 아련함이다. 아련함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느낌이다. ‘아련함’이 이 노래의 키워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모호함 그 자체인 ‘아련함’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그다음의 진술 전체를 모호하게 만들어버릴지도 모르지만, 문자 그대로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시작한다.

“꼭 그렇진 않았지만….”

언뜻 하잘것없는 이 한마디로 한국의 록음악사는 그 이전과 이후로 갈린다. 이 노랫말은 한국 록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노랫말이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꼭 그렇지는 않았’단다. 논리적으로 이 말은 그 이전에 다른 어떤 진술이 있어야 성립된다. 아이는 그 형식논리를 거부한다. 어른들은 이런 말을 가장 싫어한다. 어른들은 너무 의미깊게 살아들 오셨다. 뜻을 세워야 했다. 망한 나라의 정신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뜻 지(志)!

‘백두산의 푸른 정기 이 땅을 수호하고’(박정희 작사 작곡).

노노노노노(하수빈). 됐다고 전해라. 1977년. 나는 초등학교 5학년생이었다. 학교에서는 매일 ‘나의 조국’을 부르고 들어야 했다. 선생님은 매사에 ‘그렇다는 거야, 안 그렇다는 거야?’ 하고 따져 물었다. 그때 산울림의 1집이 발매됐다. 무자비한 유신독재의 와중에 100억불 수출 목표가 달성됐다. 아니 벌써 해가 솟았나?(산울림) 당시 대학생들은 ‘유신 반대’라고 정확하게 말했다가 사형당한 선배들을 봤다. 먹고살 걱정은 슬슬 덜하게 되었고 테니스채를 들고 다녔으며 얼굴에 윤기가 흘렀다. 그런 아이들이 장발단속한다고 가위를 들고 다니는 공권력을 좋아했을 리가 있나. 그러면서도 대놓고 ‘반대한다’고 진술할 수는 없었다. 이런 이중성이 ‘꼭 그렇진 않았지만’이나 ‘~하는 것 같아요’ 같은 어법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다.

결국 ‘꼭 그렇진 않았지만’이 포인트다. ‘렇’에서, ㄹ로 부드럽게 넘어가려다가 ㅎ 받침으로 숨을 딱 막아버리면서 은연중 호흡곤란을 겪는 이 한마디는, 한편으로는 사랑의 ‘아련함’을 표현하면서 뒤로는 슬쩍 당시 젊은이들의 시대정신을 숨기고 있다. 노래가 드러내는 정치성은 늘 이런 식이다. 노래는 답변을 회피함으로써 욕망을 드러낸다. 록은 그런 젊은이들의 언어다. 이런 노랫말을 발견한 산울림은 정말 위대하다. 우리말의 일상어법이 록음악이라는 생소한 음악문법과 딱 맞는 염기쌍을 찾는 역사적인 순간, 인식론적 단절의 순간이다. 한국 록은 산울림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노래다울 때, 노래는 늘 뜻을 팽개쳐 버린다. 고려가요의 가장 중요한 노랫말은 ‘얄리얄리얄라셩’이다. 이 후렴구의 무의미하지만 무궁무진한 매력에 빠져들면 천 년 전 선조들의 노랫소리가 쟁쟁하게 귓가에서 살아난다. 소월이 이어온 전통시의 맥은 바로 그 흐름이었고, 그 바통을 이어받은 건 시인들이 아니라 산울림이었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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