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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나는 용산참사 희생자, 그들을 잇는 통역자였다

등록 2016-01-15 19:59수정 2016-01-16 17:10

심보선,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심보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2011년 1월20일 용산 참사 2주기에 부쳐

지금 그곳엔 아무것도 없네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아무것도 없네
그곳은 텅 비었고
인적 없는 평지가 되었고
저녁 일곱 시 예배를 올릴 때에
건물 옥상에 야곱의 사다리를 희미하게 내려주던 달빛은
이제 구차하게 땅바닥에 엎드려
값비싼 자동차들의 광택을 돋보이게 할 뿐
오늘 그곳에 아무것도 없음이 우리를 경악하게 하네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되돌아볼 텐데
무너진 빌딩 한 층 한 층
깨진 유리창 한 장 한 장
부서진 타일 한 조각 한 조각
불길에 검게 그을리고 피와 살점이 묻은
학살의 증거들
학살 이후의 나날들
탄원들, 기도들, 투쟁들을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이야기할 텐데
야구와 낚시에 얽힌 소싯적 추억
늙은 가슴팍을 때리던 성경 구절
수많은 인내와 소박한 꿈들
그러다 우리가 어찌어찌 용산에 흘러오게 됐는지
그러나 더 이상 어찌어찌 끌려다니지 않겠다
이번만은 싸워보겠다 이겨보겠다
그날 불현듯 하나의 영혼을 넘쳐
다른 영혼으로 흘러간 무모한 책임감에 대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서로에게 물어볼 텐데
학살자들은 또 무슨 궁리를 할까?
우리가 울부짖기도 전에 우리의 목을 죈 그들
우리가 죽기도 전에 우리의 관을 짠 그들
그런데 우리가 무죄를 입증하기도 전에
차가운 곁눈질을 던지며 그곳을 총총히 지나치던
시민이라는 이름의 방관자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하지만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 있기만 하지는 않겠네
우리는 그 위에 일어서서 말하겠네
이제 인간이란 너 나 할 것 없이
하나하나 불붙은 망루가 되었다
생존의 가파른 꼭대기에 매달려
쓰레기와 잿더미 사이에 흔들리며
여기 사람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단 말이다!
절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고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서서 머리를 맞대고 따져볼 텐데
불운을 향해 녹슨 철사처럼 구부러지는 운명
불행을 향해 작은 자갈처럼 굴러가는 인생
모든 것의 원인과 뿌리에 골몰할 텐데
그러다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을 때에
무식한 우리는 외치겠지
어쨌든 이대로 이렇게 살 수만은 없지 않은가!
선량한 우리는 호소하겠지
원치 않는 증오심을 갖는다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 최대한 많은 영혼을
그 위로 데리고 올 텐데
언제나 배고팠던 입
먹기에 급급했던 입
그 남루했던 입술들이 층층이 쌓여
높디높은 메아리의 첨탑을 일으켜 세우면
말 못 하고 외면했던 진실을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진실을
우리는 말하기 시작하리
그리하여 거기 나지막한 돌 위에 선다면
오로지 희망, 희망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산 자와 죽은 자
기쁜 자와 슬픈 자
선한 자와 악한 자
모두 다 똑같은 결심을 하게 되리

<눈앞에 없는 사람>수록

‘거기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있다면’은 2011년 1월20일 서울역 광장에서 있었던 ‘용산 참사 2주기’ 행사에서 낭독했던 시다. 2010년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송경동 시인이 나에게 시 한 편을 써서 읽어달라고 청해 왔을 때 나는 고민을 많이 했다. 염려가 앞섰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그의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사람들 앞에서, 무엇보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유가족 앞에서 시를 읽어야 했다. 그렇다면 그 시는 그저 텍스트가 아니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건네는 말, 그들이 연루된 참혹한 사건에 관한 말이어야 했다.

내가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용산 참사에 관한 한 나는 듣는 사람이었다. 유가족들의 절규와 호소를 들으며 그들 곁에 서고 그들 뒤를 쫓는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용산 참사 현장에서 나는 유가족들과 긴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독일에서 온 다큐멘터리 팀이 유가족들과 인터뷰를 할 때, 우연히 통역을 맡게 됐다. 유가족의 말이 나의 목소리를 통해 이방인에게 전달될 때, 나는 마치 유가족의 일이 나의 일로, 유가족의 감정이 나의 감정으로 옮아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누구인가? 유가족들과 이방인들 사이에서. 나는 둘 다이기도 했고 둘 다 아니기도 했다.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나일 수 없었다. 내가 나냐 아니냐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듣고 말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시를 쓰겠다고 송경동 시인에게 약속을 하고 용산 참사 현장을 오랜만에 다시 찾았다. 남일당 건물은 온데간데없었다. 놀랍게도 그곳은 주차장이 되어 있었다. 여섯 명이 화마에 희생을 당했는데,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하는 어떤 기념비도 글귀도 남아 있지 않았다.

2009년 내내 그곳엔 사람들이 있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 글과 그림, 강론과 찬송이 있었다. 그런데 2년이 지나자 모든 것이 사라졌다. 거기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고 싸우다 죽었다는 사실이 잊히고 있었다. 죽음이 또다시 죽어가고 있었다. 용산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은 두 번의 죽음을 겪는다. 국가폭력에 의해, 그리고 집단적 망각에 의해.

그렇다면 죽은 이들의 명예와 존엄에도 두 번의 기회가 온다. 먼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국가의 사과를 받음으로써. 그리고 잊지 않음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두 번의 기회를 위해 아직도 싸우고 있다. 이 또한 용산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남일당이 있던 자리에, 주차장이 되어버린 콘크리트 바닥에 망연히 서서 생각했다. 이곳을,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을 어떻게 기억할 수 있을까? 나는 문득 ‘나지막한 돌 하나’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다.

만약 나지막한 돌 하나라도 이곳에 남아 있다면, 우리는 그 위에 앉아보기도 하고 그 위에 서보기도 할 텐데, 그 위에 앉아 지난날을 되돌아보고 그 위에 서서 앞날을 궁리할 텐데, 나지막한 돌 하나가 무수한 영혼들을, 산 영혼과 죽은 영혼 모두를 한자리에 부를 수도 있을 텐데…….

그렇게 ‘나지막한 돌 하나’라는 이미지를 붙잡고 나는 시를 썼다. 물론 시를 쓰는 것은 쉽지 않았다. 평상시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투여했다.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쳤다. 이 과정은 시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는 죽은 영혼들의 원한을 달래거나 살아남은 사람들의 지친 영혼을 고양시키는 영매가 아니었다. 나는 차라리 죽은 사람들과 산 사람들 사이에서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려 노력하는 통역자였다. 이미지 하나하나, 이야기 하나하나마다 삶과 죽음이, 과거와 미래가 연결되기를 소망했다.

심보선 시인
심보선 시인
나는 2011년 1월20일 서울역 광장에서 시를 읽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수많은 군중 앞에서 시를 읽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시는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나는 사람들에게 사람으로써 말을 하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내가 읽는 시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말, 공통의 말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심보선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나 1994년 등단. 시집으로 <슬픔이 없는 십오 초><눈앞에 없는 사람>이 있다.


선정위원의 말 슬픔이 없는 십오초의 호흡

심보선의 시가 머무르고 나아가는 힘은 ‘호시절’에 대한 기억과 열망이다. 호시절에 사람의 존엄은 곧 말의 숨결이 되고, 그 말들은 모여 다 함께 행복한 세상의 바탕이 된다. 모두 가난하지만, ‘가난한 모두의 말’이 모여 ‘가난한 모두의 풍요로운 세상’을 이룩하는 시절. 좋은 시절의 기억은 경험한 적 없는 사람의 마음에도 살아 있다. “그때는 좋았다/ 모두들 가난하게 태어났으나/ 사람들의 말 하나하나가 모여/ 풍요로운 국부(國富)를 이루었다”(‘호시절’, <눈앞에 없는 사람>)

지금이 호시절이 아닌 증거는 많다. 호시절이 오기까지 심보선의 시는 하루에 하나씩 계속 증거를 제시할 작정이다. 지금 나라의 부를 이루는 것은 울려 퍼지는 모두의 말이 아니라, 숨죽인 누군가의 슬픔이다. 가난한 모두는 점점 더 부유해지는 소수와 궁핍해지는 다수로 분열되고, 하나하나가 모여 세상을 일으켜 세우던 말들은 하나씩 흩어져 거리를 떠돈다. 삶의 선택지는 “모든 것에 대한 거짓말과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진실” 중 하나가 되고, 너와 나는 서로의 “눈앞에 없는 사람”으로 존재-부재한다. 슬픔이 없이 통과할 수 있는 삶의 장소와 시간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심보선에게 슬픔은 ‘모두’가 되지 못하는 ‘우리’가 공유하는 거의 유일한 감정이며, ‘우리’를 상실해 가는 ‘나’가 ‘너’에게 보내는 사랑의 마지막 통로이자 전언이다. 호시절이 아닌 세계에서 모든 존재와 경험과 사건은 슬픔을 부른다. 가령 이곳에서 가난은 공공의 적이며, 사랑은 자본의 잉여다. 슬픔은 휴일의 집과 “썩은 시간”의 날들, ‘사람’이 불태워지고 수장된 야만의 현장 등 세상의 어느 장소 어느 시간에나 있다.

그러나 가끔, “슬픔이 없는 십오 초”가 흐른다. 사랑을 멈출 수 없어 슬픔도 멈출 수 없는 삶에 잠시 숨구멍을 여는 십오 초가. 이 무시간을 호흡하며 심보선은 시를 쓰고, 우리는 세상의 화염에 그을린 그의 시를 읽는다. 그리하여 “예술은 다른 곳에서 되살아날 것이다. 삶 속에서, 삶의 불길에 그을린 채.”(심보선, <그을린 예술>)

김수이(문학평론가,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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