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이바라기 노리코(1926~2006)
어딘가 아름다운 마을은 없을까
하루 일을 끝낸 뒤 한잔의 흑맥주
괭이 세워 놓고 바구니를 내려놓고
남자도 여자도 큰 맥주잔 기울이는
어딘가 아름다운 거리는 없을까
과일을 단 가로수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노을 짙은 석양
젊은이들 다감한 속삭임으로 차고 넘치는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같은 시대를 더불어 살아가는
친근함과 재미 그리고 분노가
날카로운 힘이 되어 불현듯 나타나는
현대 일본의 여성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6월’. 내가 이 시를 처음 읽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세기도 더 지난 옛날이다. 중학생 시절의 나는 이 시에 그려진 ‘유토피아’(그것도 노동하는 남녀의 유토피아) 이미지에 매료당했다. “과일을 단 가로수”들이 늘어선 거리란 바로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조선 민중이 그리던 꿈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정도 지난 뒤 모국 유학 중에 군사정권에 의해 투옥당한 형(서준식)에게 <이바라기 노리코 시집>을 넣어주었더니, 형은 이 시에 각별한 애착을 느낀 듯 자신이 이 시를 번역해서 옥중에서 쓴 편지에 적어 보냈다. 가장 험악했던 군사독재 시절에 이 ‘유토피아’ 이미지가 한국 옥중의 젊은이에게 전달됐던 것이다. 그 소식을 당시 일면식도 없었던 시인에게 전했더니, 그는 굳이 내가 사는 교토까지 찾아와 주었다. 처음 만난 그 사람은 상큼했다.
이바라기 노리코는 1926년생이다. 초기 작품에 ‘내가 가장 고왔을 때’라는 게 있다. ‘내가 가장 고왔을 때 전쟁으로 사람들이 죽었다, 거리는 파괴되고 쓰레기로 뒤덮였다, 나는 멋쟁이가 될 기회를 잃어버렸다’, 고 노래한다. 그러나 피해자 의식에 사로잡힌 한탄의 노래는 아니다. 봉건제와 군국주의의 멍에에서 해방돼 자립하려는 여성의 눈부심, 어딘가 “폐허에 내리비치는 빛”이라고도 할 수 있는 광휘로 가득 차 있다.
그 뒤 세상은 바뀌어 많은 동료 시인들(그것도 남자들)이 무기력한 현실 긍정 쪽으로 돌아선 상황에서도 그녀는 한평생 변함없이 그 광휘를 잃지 않았다. 1975년 10월31일 쇼와 ‘천황’이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서는, 나는 문학 방면에 관해서는 제대로 연구한 바가 없어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다. 제국의 절대권력자였고, 전쟁의 최고사령관이었던 천황이 타국과 자국의 무수한 국민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전쟁책임에 대해 ‘언어의 기교’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책임을 교묘하게 얼버무리며 속였던 것이다. 게다가 더욱 놀랍게도 거의 모든 일본 지식인들도 언론도 이 발언을 문제삼지 않았다. 이바라기 노리코 한 사람을 빼고는….
“전쟁책임에 대해 묻자/ 그 사람은 말했다/ 그런 언어의 기교에 대해/ 문학적 방면은 별로 연구하지 않아서/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와/ 거무칙칙한 웃음 피를 토하듯/ 뻗쳐올랐다가, 멈추고, 다시 뻗쳐오른다”(‘사해파정’(四海波靜)에서)
만년의 그녀는 조선어를 독학해서 윤동주 등 조선 시인들을 일본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한편, 사회의 급속한 우경화를 개탄했다. 1999년 73살의 나이에 낸 시집 <기대지 말고>는 ‘히노마루(일장기)·기미가요(국가)’의 법제화가 강행되던 와중에 출판됐다. “이미 어떤 권위에도 기대고 싶지 않다/ 오래 살아 속속들이 배운 것은 그 정도” “기댄다면/ 그것은/ 의자 등받이뿐”
2006년 2월, 시인이 내게 부친 편지가 도착했다. “이번에 나는 (2006)년 (2)월 (17)일, (지주막하출혈)로 이 세상을 하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전에 써 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사망통지서까지 준비해 놓고 홀로 떠나간 것이다. 지금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6월’에서 노래한 유토피아 이미지는 오히려 냉소의 대상이 돼 있다. “어딘가 아름다운 사람과 사람의 힘은 없을까…” 지금은 저 유토피아의 빛과 시인의 상큼했던 뒷모습을 상기해야 할 때다.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