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김시습(金時習)
[원제: 자화상에 부쳐(自寫眞贊)]
附視李賀 | 이하(李賀)를 내려다볼 만큼
優於海東 | 조선 최고라 했지.
騰名瞞譽 | 드높은 명성과 헛된 기림
於爾孰逢 | 어찌 네게 걸맞을까?
爾形至眇 | 네 몸은 지극히 작고
爾言大侗 | 네 말은 지극히 어리석네.
宜爾置之 |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丘壑之中 | 저 개굴창이리라.
김시습 선집, <길 위의 노래>(정길수 편역, 돌베개, 2006)
십대 시절 읽은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는 당시 유행했던 영화 <천녀유혼> 같은 홍콩 산(産) 귀신 로맨스에 비하면 시시하게 느껴졌다. 배필 없음을 탄식하던 양생(梁生)이라는 청년이 부처님과 저포(윷) 놀이를 하여 이긴 대가로 한 여인을 만나 꿈결 같은 며칠을 보냈으나, 알고 보니 그녀는 전쟁 통에 억울하게 죽은 여성이었던지라, 결국 짧은 인연을 뒤로한 채 저승으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이별 이후에 양생이 집과 밭을 모두 처분하여 장례를 치러준 덕에 그녀는 다른 나라에서 남자로 환생할 수 있었고 목소리로만 다시 나타나 양생에게 고마움을 표했다는 이야기였다.
세월이 흘러 다시 읽었을 때에야 ‘만복사저포기’의 마지막 대목 앞에서 골똘해졌다. “양생은 이후 다시 장가들지 않았다.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는데 그가 어떻게 생을 마감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금오신화>, 이지하 옮김, 민음사, 32쪽)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죽은 아내가 다시 나타나자 귀신인 줄 뻔히 알면서도 사랑했다가 재차 헤어지게 된 ‘이생규장전’의 주인공은 정도가 더 심하다. “이생은 그녀의 유골을 거두어 부모님 무덤 곁에 묻어 주었다. 장사를 지낸 뒤 이생도 최씨와의 추억을 생각하다 병을 얻어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같은 책, 58쪽) 왜들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첫 번째 대답. 이것이 소설이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금오신화>는 우리 최초의 소설이다. 많은 문학이론가들에 따르면 소설은 본질적으로 패배의 기록이다. 세계의 완강한 질서에 감히 도전하는 개인이 있는데, 그는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를 끝내 포기하지 않는 것이어서, 그 비타협의 결과로 그는 패배하는 것이지만, 그 순도 높은 패배가 오히려 주인공의 궁극적 승리가 되는 아이러니의 기록,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것. 그러므로 ‘위대한 개츠비’라는 말이 성립될 수 있다면, ‘위대한 양생/이생’이라는 말도 가능하다. 비록 운명에는 패배했으나 사랑에 관한 한 타협하지 않았으니까.
두 번째 대답. 이것을 쓴 사람이 김시습이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3세에 첫 시를 읊었고 5세에 ‘신동 김오세(金五歲)’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9세에는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려 했으나, 단종의 삼촌인 수양대군이 계유년(1453, 단종 1)에 쿠데타를 일으키고 을해년(1455, 단종 3)에는 왕위까지 찬탈하자, 김시습은 통곡 끝에 책을 불사르고 똥통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에 승려가 되었다. 병자년(1456, 세조 2)에 버려진 사육신(死六臣) 중 다섯의 시체를 목숨을 걸고 수습하여 묘를 마련한 것도 그였다. 위대한 패배의 기록을 쓸 수 있는 자격이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는 않는다.
요컨대 <금오신화>가 최초의 소설인 것과 그 작자가 김시습인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금오신화>의 고독한 인물들은 김시습 자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 결함세계 속에 사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완전한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함으로써 슬픔을 느끼는 존재들이며,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그 슬픔에 공감한다. 하지만 그러한 자각은 결코 현실 도피를 유도하지 않으며, 오히려 개개인에게 현실에 살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자기 혁신의 고투를 요구한다.”(심경호, <김시습 평전>, 돌베개, 273쪽)
그런데 앞서 인용한 말년의 시에서 김시습은 세상이 자신에게 속고 있다며 거의 자기혐오에 가까운 문장들을 적었다.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와 더불어 비참해졌고 마지막 구절에서는 전율했다. “네가 죽어 버려질 곳은 저 개굴창이리라.” [이 문장은 대개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깊은 골짜기 속에.”(심경호, 앞의 책, 31쪽) 정도로 옮겨지면서 은둔자로서의 숙명을 수락하는 구절로 읽힌다. 그래서 나는 나를 전율하게 한 번역자(정길수)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오역이 될 위험을 무릅쓰고 그렇게 옮겼다 했다. 그것이 자신이 이해한 김시습이라 했다. 나는 그를 따른다.] 무엇이 김시습에게 그런 문장을 쓰게 했을까.
사육신이 있으면 생육신도 있다. 나는 김시습의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내면을 생각한다. 브레히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의 원제목은 ‘나, 생존자’(Ich, der <00DC>berlebende)인데 그러고 보니 이 시의 마지막 문장도 이렇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und Ich haßte mich) 번역자인 김광규 시인이 이 시의 제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의역한 것은 훌륭한 선택이었지만, 저 마지막 구절에 주목한다면, 이 시에 더 또렷한 감정은 ‘살아남은 자의 자기혐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혐오가 도무지 마땅해 보이지 않는다. 죽는 사람이 있다면, 통곡하며 시체를 묻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기왕 살 것이라면 편안하게 살고 싶다는 끔찍한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발견에서도 올 것이다. 세상이 생육신의 지조를 칭송하면 할수록 그는 제 안의 잠재적 배신자와 지긋지긋한 싸움을 해야 했으리라. 싸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자기혐오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이후 세조를 관례적인 문장으로나마 치하하기도 했고, 국가 주도 불경 언해 사업에도 참여했으며, 세조에게 도첩(度牒, 승려 신분증)을 받아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받기도 했다. 이를 두고 변절이라고 비난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조금 흔들렸다고 상상해볼 수는 없을까.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흔들리다 부러지지는 않았다. 그 무렵에 그가 또 한 번 똥통에 들어갔다 나온 것은 밖의 더러움으로 안의 더러움을 씻어내기 위한 제의였을지도 모른다. 이어 왕의 부름에 응하지 않겠다는 시를 써서 세조에게 보냈고 그 후로도 내내 그가 지켜야 할 약속을 지키며 살다 죽었다. 아홉 살 때 자신을 알아봐준 어진 임금 앞에서 한 약속, 어린 임금이 쫓겨나고 끝내 살해될 때 통곡하며 한 약속, 책을 태우고 머리를 깎고 미친 척을 하면서 한 그 약속을, 양생이나 이생처럼, 지켜냈다. 평생을 두고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으니 그의 생은 내내 고달팠겠으나 단 한순간도 무의미하지는 않았으리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