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이노의 비가’ 중 제2비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중략)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너희들은 손을 꼭 잡는다. 그것으로 증명하는 것인가?
그렇다, 내 자신의 두 손도 서로를 느끼고, 혹은 그 두 손 안에
지친 얼굴을 묻고 쉬는 일도 있다. 그것이 얼마간은
나 스스로를 감지하게도 한다. 허나 누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연인들이여, 서로가 상대의 환희 속에서
성장하는 너희들. 끝내는 압도되는 상대가
<이제 그만>, 하고 애원하는 너희들 ─ 서로의 애무 속에서
풍년 든 포도처럼 풍요하게 영그는 너희들.
다만 상대가 완전한 우위를 차지하는 것만으로도
가끔은 소멸하는 너희들. 너희에게 묻는다, 우리들 인간의 존재를. 나는 알고 있다,
너희들이 그처럼 행복하게 서로를 어루만지는 것은, 애무가 시간을 멈추기 때문이다.
애정 깊은 너희들이 가리고 있는
그 장소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희들이 그 아래서 순수한 지속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게 너희들은 서로의 포옹이 영원하기를 약속하리라.
허나 첫 시선의 놀라움과 창가에서의 그리움을 이겨 내고,
함께 거닐던 <첫>산책, 단 한 번뿐이던 그 정원에서의 산책을 견뎌 냈을 때,
연인들이여, 그때에도 너희들은 <영원한>연인으로 남아 있을 것인가?
너희들이 발돋움하며 입술을 맞대고 서로 마실 때
아, 얼마나 그때 기이하게도 마시는 자는 그 행위로부터 멀어져 가는가!
(후략)
* 릴케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손재준 옮김, 열린책들, 2014)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이 몇 권 있다. 최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릴케 시선집 <두이노의 비가>(손재준 옮김, 열린책들, 2014)이다. 여느 시 번역들과는 달리 ‘성실한 실패작’이 아니다. 딴에는 틈틈이 릴케를 읽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는 마치 릴케를 처음 읽는 듯 감동하고 말았다. 많은 경우 외국어로 쓰인 시들은 번역되자마자 시로서 작동(work)하기를 멈춘다. 그러나 이 책에서 릴케는 한국어로 시를 쓰고 있었다. 수십 년 다듬어 왔을 번역을 여든이 넘어 세상에 내놓은 역자의 노고에 먼저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처음 읽은 릴케의 시는 아마 ‘가을날’이었을 것이다. ‘화려하게 급진적인’ 시들에 끌리던 때여서 무심히 지나치고 말았다. 몇 년 후에 어느 미학이론서에 인용돼 있는 ‘고대 아폴로의 토르소’를 읽고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라는 상투적 표현의 의미를 실감했다. 이어 20세기 이후의 시들 중 가장 위대한 것에 속한다는 ‘두이노의 비가’ 연작에 도전했으나 역시 어려웠다. 본래 어려운 대목과 번역 때문에 어려워진 대목을 구별해내는 작업만으로도 힘겨웠다. 그러나 포기하기보다는 평생을 두고 읽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굉장한 것이 담겨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릴케인가. “릴케의 시에는 답이 없다. 인간의 언어로 제기된 역사상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질문이 있을 뿐이다.” 어디엔가 이렇게 쓴 적이 있는데 이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답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이 있기는 하되 그것이 질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렇다. 위대하다는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그들의 답에 놀라본 적이 별로 없다. 그 답은 너무 소박하거나 반대로 너무 거창했다. 그러나 어느 분야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지는 못한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 열 편을 정확히 10년(1912~1922) 동안 썼다. 1년에 한 편씩 썼다는 뜻이 아니라, 10년 동안 질문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평전 <릴케>(볼프강 레프만, 김재혁 옮김, 책세상, 1997)의 저자는 그의 질문이 “신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상실된 시대에 인간 실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561쪽)라고 요약했다. ‘인간 실존의 의미’라니, 오늘날 이런 말은 에스엔에스(SNS)에서 조롱거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답을 찾지도 못했는데 질문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고 묻는 백 년 전 릴케의 목소리는 왜 이토록 간곡한 것인가.
그의 간곡함은 어떤 난처함과 절박함의 산물로 보이는데, 그것은 우리가 천사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인간이라니. 천사처럼 완전하지도 동물처럼 순수하지도 않은, 이 어정쩡한 인간이라니. 그래서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종(種)을 대표하여 그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다. 먼저 천사.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 그가 두이노 성(城) 해안에 서 있을 때 바람결에 실려 온 이 문장 덕분에 제1비가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리고 동물. “명민한 동물들은 우리가 이 해석된 세계에서 마음 편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인간에 의해 ‘해석된 세계’가 인간을 불안하게 만드는 아이러니 속에서 릴케는 동물들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천사도 동물도 아닌 인간이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흔히들 말하는 대로 ‘사랑의 주체’로 살아가면 되는 것일까. 그래서 제2비가에 오면 릴케의 질문은 천사나 동물이 아니라 연인들에게로 향한다. “연인들이여, 어울려 만족하는 그대들이여, 너희들에게 묻는다, 우리의 존재를.” 릴케는 회의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연인들은 서로 손을 잡는다. 그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이 그들이 진실로 인간으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 그것은 내가 내 두 손을 맞잡고 얼굴을 감싸 안을 때 느끼는 희미한 존재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너무 냉소적인 것 아닌가. 물론 릴케가 사랑의 환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시간을 멈추고 장소를 보존한다. 그것은 “순수한 지속”이다. 그런데 릴케의 요점은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데 있다. 첫 시선의 놀라움, 창가에서의 그리움, 첫 산책의 설렘. 그 모든 ‘첫’들이 지나고 나면 연인들은 멀어진다는 것. ‘서로를 마시는’ 행위인 키스조차도 이렇게 변질된다. “얼마나 그때 기이하게도 마시는 자는 그 행위로부터 멀어져 가는가!” 이 구절은 아름답고 가혹하다. 마시는 자가, 마시는 동안, 마시는 행위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모습, 그렇게 사랑은 끝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어찌해야 하는가.
제2비가의 후반부에서 릴케는 “아티카의 묘석에 새겨진 인간의 몸짓”을 보라고 권유한다. ‘아티카의 묘석’(attischen Stelen, Attic gravestones)을 검색하면 나오는 것은 상대방의 어깨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린 연인들의 모습이다. “거기서는 사랑과 이별이 마치 우리의 경우와는 다른 소재로 만들어진 듯, 가볍게 두 사람의 어깨 위에 얹혀 있지 않는가.” 언젠가 릴케는 문제의 묘석을 실제로 보았고, 거기 부조된 고대의 연인들(“절제하고 있는 그들”)에게서 ‘절제하는’ 사랑의 역설적 깊이를 보았다. 그가 말하는 ‘절제’란 사랑이 완전연소되지 않도록 가장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기술일 것이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하기로 결심하는데 이를 제2비가의 결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살며시 어루만지는 것,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임을.” 사랑 따위 아무 의미 없다는 말이 아니다. 격정으로서의 사랑이 덧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사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진실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천사가 껴안으면 바스러질 뿐인 우리 불완전한 인간들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그를 ‘살며시 어루만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인간의 사랑이 취할 수 있는 최상의 자세이니까. 사랑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누구도 상대방에게 신이 될 수 없으므로.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