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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새로운 입구, 전형적인 삶으로부터의 자유

등록 2016-02-05 20:36수정 2016-02-07 09:34

진은영, 나의 시를 말한다
그 머나먼

홍대 앞보다 마레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셈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오랫동안 내게 홍대 앞은 그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닌 직장이 있던 거리였다.

그때가 1990년대 후반이었으니까 시가 쓰여진 2010년과는 10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 하지만 특별히 고된 시간이어서 그랬는지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이후로도 강렬하게 남았다. 내가 다닌 직장은 철학을 전공한 선배들이 운영하던 논술학습지 회사였다. 나는 근무시간 동안 수백 장의 논술문을 분류하거나 채점하고는 저녁부터 새벽까지 사무실에 남아 대학원 수업 발표 준비나 과제를 하곤 했었다. 외출이라고는 산울림소극장 뒤편에 있던 사무실에서 홍대 근처의 문구점까지 사무용품을 사러 가거나 저녁거리로 김밥을 사러 가는 일이 전부였다. 당시 인디음악을 하는 예술가나 젊은 문인들이 자주 모인다는 홍대 앞 카페와 주점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딴 세상이었다.

월급으로 비싼 등록금을 겨우 메우고 나면 밥값도 잠도 한참 부족했다. 그 시절 내게 시를 쓴다는 건 프랑스 혁명기에 자유를 위해 행진하던 시민군들의 이야기만큼이나 멀게 느껴졌다. 시인의 삶은 내게는 파리의 거리와 같은 것이었다. 단지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놀라운 기쁨과 모험과 희망이 골목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고 상상하게 되는 그런 곳 말이다. 그때 나는 시를 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시인의 삶에 대한 온갖 종류의 아름다운 몽상에 빠지곤 했다.

등단을 하고 학교를 졸업했지만 여전히 쪼들렸다. 그래도 등록금을 안 내는 것만으로도 삶이 구름처럼 가볍게 느껴질 무렵, 운 좋게 공공기관의 지원기금을 받아 파리에 갈 기회가 있었다. 당시 그곳에서 유학하고 있던 친구의 권유로 마레 지구를 찾아갔다. 그 친구는 마레 지구가 서울의 홍대 앞과 비슷한 곳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숙소 부근의 리옹역에서 조금 걸어가 마레 지구가 시작되는 곳에 이르자 7월혁명을 기리는 바스티유 혁명기념탑이 보였고, 마침 그곳에서는 성소수자들의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었다.

마레 지구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개이다. 그 길들 사이사이에는 붉은색 문의 오래된 성당이 있고 빅토르 위고의 저택과 옛 귀족들의 광장이 있으며 젊은이들이 몰려드는 패션숍들과 달콤한 초콜릿 상점들이 있다. 유태인들이 모여 살던 거리도 있다. 내가 그 동네 출신이었다면 팔라펠을 파는 조그만 유태인 식당에서 종일 일하며 방값과 책값을 마련하는 고학생으로 살았을 것이다. 짧은 휴식시간에는 병아리콩 튀긴 냄새를 풀풀 풍기며 비트시인들의 시집을 뒤적이거나 그들을 통해 알게 된 불교 사찰의 저녁 풍경 소리를 상상하지 않았을까? 멀리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좋은 일들과 위대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거라고 마음껏 그려볼 수 있는 동양의 신비한 거리들에 내 열망들을 투자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늘 먼 곳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것 같다. 이것은 독특할 게 없는 평범한 욕망이다. 여기에는 특별히 예술적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없다. 그러나 이 시를 발표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머나먼 곳으로의 잠행이 마레 지구나 다른 낯선 도시들에 가지 않아도 가능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2010년 가을 홍대 앞에서 젊은 시인들과 인디밴드 음악가들이 철거투쟁 공간이었던 두리반 식당을, 그리고 해고노동자들을 위한 문화제가 열리던 클럽 ‘빵’을 시와 음악으로 채우며 법석을 떠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그 이전, 내가 논술시험 정답을 빼곡히 적고 있던 시절에도 그들은 내 직장이 있던 골목 근처 어디쯤 그 머나먼 곳에서 곡을 만들고 연주를 하며 시와 음악을 섞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홍대 지구로 들어가는 길목 어느 한켠에 붙박여서 또 다른 입구가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다른 입구로 들어가면 익숙한 공간도 머나먼 곳으로 바뀌는 마술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 수전 손택은 말한다. “예전에 일어났던 멋진 일 중 하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변인이 되기를 선택했고 또 다른 사람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는 겁니다.” 새로운 입구를 발견하고 전형적인 삶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은 여전히 꽤 괜찮은 일이고 생각만큼 두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철학과 시 사이를 오가며 그것을 배울 수 있었다.

진은영
진은영
진은영

2000년 <문학과 사회> 봄호에 네 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시집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우리는 매일매일>을 냈다. 니체에 관한 연구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훔쳐가도 좋다”

같은 세계를 다르게 배치하는 것.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로 도약하는 것. 진은영은 다른 세계가 이 세계의 밖이 아니라, ‘먼 곳’의 형태로 이 세계의 안에 존재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먼 곳은 지금 여기의 현실에 깃들어 있는 (불)가능성을 압축한다. 먼 곳을 품은 덕에 세계는 본래보다 더 넓어질 수 있고, 삶은 실제보다 더 풍부해질 수 있다.

‘먼 곳’에는 우리가 가진 적 없이 잃어버린 것들과, 마땅히 가져야 하나 갖지 못한 것들이 영주한다. 먼 곳은 실은, 불완전한 세계와 삶에 상처처럼 뚫려 있는 빈 곳이다. 가까이 있으나 어디에도 없는 이 빈 곳=먼 곳은 세계와 삶의 빈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새로운 배치의 가능성을 공급한다.

먼 곳을 편애하는 시인 진은영은 재현이 아닌 재배치를 통해 현실에 개입한다. 이때 시는 세계를 재배치하고 삶을 재구성하는 기술이 된다. 진은영이 추구하는 시는 감각의 낡은 매뉴얼을 버리고 계속 새 버전을 제작해 배포하는, 즉 무의식적 차원의 ‘감각의 재분배’(자크 랑시에르)를 통해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려는 미학적이며 정치적인 운동이다. ‘사랑’과 ‘혁명’의 동의어인 이 운동은 세계가 그대로여도 주체가 위치와 행위를 바꿈으로써 진전된다. 진은영의 말처럼, 같은 장소도 다른 문으로 들어가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

재배치는 세계의 고착과 반복, 양극화에 저항하는 전략이다. 진은영의 시는 나와 타자, 이것과 저것, 단어와 우정, 금잔화와 망치 등을 바꾸는 “공정한 물물교환”(<훔쳐가는 노래>)의 장소가 된다. 이곳에서는 독특한 물품이 진열되고, 파격적인 거래가 이루어진다. 단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진은영의 첫 시집)을 살 수 있고, “그 머나먼” 것과 내 손안의 것, 다른 것과 같은 것을 바꿀 수 있다. 그중 가장 놀랍고 아름다운 물물교환은 낡은 세계를 지불하고 새로운 세계를 사는 것이다. 우리의 낡은 감각과 상상력을 새것으로 교환해 주는 ‘시’의 좌판 앞에는 진은영이 써놓은, ‘훔쳐가도 좋다’는 안내문이 걸려 있다.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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