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문화일반

외롭구나, 갈매나무야

등록 2016-02-26 20:21수정 2016-02-28 10:05

김남희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위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노부부의 뒷모습, 제 아이를 바라보는 여자의 깊은 눈빛, 긴 그림자를 끌며 집으로 돌아가는 가장의 어깨. 내 것이 아니라고 포기했던 다정한 일상의 풍경에 흔들리는 날이 있다. 스스로 선택한 삶이건만 어쩌다 나는 이곳에 혼자 서있는 건가 싶은 날, 백석의 시는 저물녘 종소리처럼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 또한 어느 사이에 남편도 없고 집도 없이 가족과도 떨어져 낯선 거리를 헤매고 있어서일까. 뜨거워지는 눈두덩을 누르며 이 시를 읽고 나면 시인의 손이 가만히 내 어깨에 와서 얹히는 것 같았다.

쓸쓸할 때면 버릇처럼 백석의 시를 읽곤 했는데 지난해에는 아예 머리맡에 그의 전집을 놓고 지냈다. 바야흐로 밥벌이의 고단함을 제대로 깨치던 날들이었다. 13년 전,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겠다고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나는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돈이 아니라고 큰소리치며 살아왔지만 정작 쌀도, 돈도 떨어진 처지가 되어보니 덜컥 겁이 났다. 수입 없이 빚으로 살아야 했던 몇 달 만에 그렇게 무너진 걸 보면 나는 진짜 가난은 겪어본 적도 없는 겁쟁이에 불과했다. 마흔다섯 해를 살도록 ‘반 전세’를 못 벗어난 스스로에 대한 자책, 끌어안고 잠들 가족 하나 없다는 결핍감, 내 삶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나라에 대한 분노로 밤마다 잠을 설쳤다. 고질적 지병인 엄살과 청승에 기대어 종말이라도 맞은 듯 비탄에 빠졌다. 내 삶의 끝자리가 고독사 아니면 객사, 더 나쁘게는 그 두 가지가 조화롭게 어울린 객지에서의 고독사가 되어 버릴까봐 무서웠다. 그 무렵 제일 부러웠던 사람은 자식이나 남편이 있는 여자였다. 적어도 저 여자는 혼자 죽는 일은 없겠구나 싶었다. 누구의 아내, 엄마, 며느리 이런 이름으로 살지 않겠다고 제 발로 뛰쳐나왔건만 곁에 아무도 없는 현실이 사무치게 서러웠다.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 같은 날들이었는데, 나보다 더 나를 믿어준 이들이 있었다. 모자란 전세자금을 선뜻 빌려준 선생님, 억지로 불러내 더운밥을 먹이던 언니, 불쑥 찾아와 너만 외로운 건 아니라며 다독이던 친구, 새 마음으로 길 떠날 때 쓰라며 노잣돈을 건네준 선배, 어떤 모습이어도 사랑스럽다고 끌어안아주던 어린 동생. 내가 일군 가족은 아니었지만 나를 일으켜 세운 건 그들이었다.

김남희 여행가
김남희 여행가
그제야 이 시가 새롭게 읽혔다. 나라를 잃고 떠돌던 시인이 남긴 글이 세상의 모든 ‘루저’들에게 보내는 위로로 다가왔다. 세상이 요구하는 빛나는 성취 같은 건 하나도 이루지 못한 패자들. 승자가 되기 위해 시간과 몸과 때로는 영혼까지, 지닌 모든 것을 바치지만 결국 패하고 마는 ‘보통의 존재’들.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며 살아가지만 끝내 괴물만은 되지 않겠다고 애쓰는 약자들. 그들이 내 갈매나무였다. 세상의 엄격한 기준으로 따져본다면 ‘루저’ 아닌 이가 얼마나 있을까. 천지가 개벽하지 않는 한 아마도 우리 대부분은 마지막까지 이 비정한 세계의 승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단지 마음이 혼탁해질 때마다 서로의 거울이 되어주는 것. 스스로 정한 최후의 선만은 넘지 말자고 서로에게 굳고 정한 갈매나무가 되어주는 것. 그렇게 살아가는 한 우리는 고결한 패자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김남희 여행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취했나 봄’ 패러디 쏟아지고…문화·체육계도 ‘계엄 후폭풍’ 1.

‘취했나 봄’ 패러디 쏟아지고…문화·체육계도 ‘계엄 후폭풍’

12·3 계엄 ‘서울의 밤’…현실이 영화를 이겨버리네 2.

12·3 계엄 ‘서울의 밤’…현실이 영화를 이겨버리네

콩으로 쑨 된장·간장, 한국 23번째 인류무형유산 됐다 3.

콩으로 쑨 된장·간장, 한국 23번째 인류무형유산 됐다

연예계도 계엄 여파 ‘혼란’…두아 리파 내한공연 두고 문의 빗발 4.

연예계도 계엄 여파 ‘혼란’…두아 리파 내한공연 두고 문의 빗발

202:1 경쟁률 뚫고 ‘60초 독백’ 열연…한국영화 이끌 얼굴들 모였다 5.

202:1 경쟁률 뚫고 ‘60초 독백’ 열연…한국영화 이끌 얼굴들 모였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