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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미안하다 영근아

등록 2016-03-11 20:28수정 2016-03-12 11:35

김명인의 시 이사
이사 박영근

1
내가 떠난 뒤에도 그 집엔 저녁이면 형광등 불빛이 켜지고
사내는 묵은 시집을 읽거나 저녁거리를 치운 책상에서
더듬더듬 원고를 쓸 것이다 몇 잔의 커피와,
담배와, 새벽녘의 그 몹쓸 파지들 위로 떨어지는 마른 기침소리
누가 왔다갔는지 때로 한 편의 시를 쓸 때마다
그 환한 자리에 더운 숨결이 일고,
계절이 골목집 건너 백목련의 꽃망울과 은행나무 가지 위에서 바뀔 무렵이면
그 집엔 밀린 빨래들이 그 작은 마당과
녹슨 창틀과 흐린 처마와 담벽에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햇살에 취해 바람에 흔들거릴 것이다
눈을 들면 사내의 가난한 이마에 하늘의 푸른빛들이 뚝 뚝 떨어지고
아무도 모르지, 그런 날 저녁에 부엌에서 들려오는
정갈한 도마질 소리와 고등어 굽는 냄새
바람이 먼 데서 불러온 아잇적 서툰 노래
내가 떠난 뒤에도 그 낡은 집엔 마당귀를 돌아가며
어린 고추가 자라고 방울토마토가 열리고
원추리는 그 주홍빛을 터뜨릴 것이다
그리고 낮도 밤도 없이 빗줄기에 하늘이 온통 잠기는 장마가
또 오고, 사내는 그때에도
혼자 방문턱에 앉아 술잔을 뒤집으며
빗물에 떠내려가는 원추리꽃들을 바라보고 있을까 부러져나간
고춧대와 허리가 꺾여버린 토마토 줄기들과 전기가 끊긴
한밤중의 빗소리······ 그렇게
가을이 수척해진 얼굴로 대문간을 기웃거릴 때
별일도 다 있지, 그는 마당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누군가 부쳐온 시집을 읽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물결을 끌어당기고 내밀면서
내뱉고 부르면서
강물은 숨쉬는가

2
그 낡은 집을 나와 나는 밤거리를 걷는다
저기 봐라, 흘러넘치는 광고 불빛과
여자들과
경쾌한 노래
막 옷을 갈아입은 성장(盛裝)한 마네킹들
이 도시는 시간도 기억도 없다
생(生)이 잡문이 될 때까지 나는 걷고 또 걸을 것이다
때로 그 길을 걸어 그가 올지 모른다 밤새 얼어붙은 수도꼭지를
팔팔 끓는 물로 녹이고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는,
그런 모습으로 찾아와 짠지에 라면을 끓이고
소주잔을 흔들면서 몇편의 시를 읽을지도 모른다
도시의 가난한 겨울밤은 눈벌판도 없는데
그 사내는 홀로 눈을 맞으며
천천히 벌판을 질러갈 것이다

시인 박영근, 1958년생으로 나와 동갑내기인 그는 2006년 마흔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최종 사인은 결핵성 뇌수막염이지만, 그는 죽기 얼마 전부터 술 외엔 일체의 곡기를 끊고 사실상 ‘자진’(自盡)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의 부음을 듣고 내가 문상을 갔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그의 사후에 한 번도 그를 기리는 행사나 모임에 참여한 적이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내 삶도 무겁고 힘겨웠기 때문이다. 하긴 생전에도 그와 나는 속 깊은 교류를 할 정도로 각별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가 죽기 전 한 10여년 동안은 어디서 마주친 일조차 거의 없었다. 그나마 그와 종종 만나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 사이에도 그를 만날 때면 나는 그의 하염없는 ‘술꾼질’에 질려 술 좀 작작 마시라는 날선 타박을 앞세웠고 따뜻한 말 한마디는 늘 뒷전이었다.

하지만 그가 죽고 난 뒤, 그가 남긴 시들을 비로소 찬찬히 읽으면서 나는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 간 것이 분명한 그의 깊이 모를 환멸과 고독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노동시인이라는 저주받은 계관 때문에 차마 시로 남기지 못하고 오직 술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었던 그의 깊고 서늘한 내면의 풍경들, 나는 무슨 권리로 그렇게 그를 타박했을까 후회했지만 이미 그는 가고 없었다. 미안하다 영근아, 정말 미안하다. 늬가 스스로 목숨을 죽여 가며 이 끔찍한 시대와 맞서는 동안 나 역시 아무런 대책도 없으면서 너의 삶을 대책 없는 삶이라고 몰아세웠었구나.

세상을 한꺼번에 뒤집을 수 있으리란 헛된 미망으로 가득했던 80년대를 보내고 환멸의 90년대와 모멸의 2천년대를 지나오는 동안, 한때는 함께 어깨를 겯고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뿔뿔이 흩어져 제가끔 홀로 지옥 같은 세상을 견뎌내어야 하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재빨리 옛일들을 잊었고 어떤 이들은 약간의 회한을 품고도 그럭저럭 살아남았지만 어떤 이들은 도저히 이런 세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순결한 이들이다.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어떤 의지도 방법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다. 박영근은 그중에서도 가장 여리고 순결한 사람이었다.

김명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김명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이제 5월이 오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된다. 그가 생애의 거의 마지막이 되어 쓴 시 ‘이사’를 다시 읽는다. 가난한 시인이 겨울 벌판을 지나 세상 밖으로 가뭇없이 사라져간다. 이 끔찍한 생에 대한 미련을 접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그 집에 남아 시인의 일상을 지속하고 있는 또 다른 자기를 보고 있다. 이 구차한 생에 그래도 미련이 남은 까닭이다. 얼마나 떠나고 싶었을까, 하지만 얼마나 머무르고 싶었을까. 그 눈물겨운 갈등을 뒤로하고, 그는 결국 세상을 버렸다. 아니, 세상이 그를 버렸다. 생전에 그가 그토록 좋아하던 소주 한 잔 제대로 권하지 못한 나 역시 그를 버렸다. 미안하다 영근아, 정말 미안하다.

김명인 문학평론가·인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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