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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밥그릇 위에 손을 올려놓고…

등록 2016-03-18 20:40

박찬일의 시 공손한 손
공손한 손 고영민

추운 겨울 어느 날
점심 먹으러 식당에 들어갔다
사람들이 앉아
밥을 기다리고 있었다
밥이 나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밥뚜껑 위에 한결같이
공손히
손부터 올려놓았다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보내드릴 때였다. 염장이가 쌀알 한 움큼을 집어 아버지 입에 넣어드렸다. 나는 눈물바람에도 딱딱한 쌀 한입을 아버지가 좋아하시지 않을 것 같아 짧은 순간 노심초사했다. 수의는 거칠고 밥은 생쌀이니 풍습과 장례를 감안하더라도 나는 그저 발을 동동 굴렀다. 참기름 바른 것처럼 윤기 도는 밥 한술 대신 생쌀을 쓰는 건, 인간의 편리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은가. 하여튼 길고 긴 황천길에 동전 몇 푼 노자 삼고 쌀 한 줌으로 어떻게 기어이 가셨는지 모르겠다.

학교 다니던 시절에 단골 막걸리집이 있었다. 다들 어머니라고 부르는 노파 한 분이 술상 차리고 객쩍은 애들 헛소리도 받아주던 정겨운 집이었다. 이 노파가 좋아하는 손님이 하나 있었으니, 외상값 잘 갚는 친구도 아니고 말술 마셔서 매상 올려주는 녀석도 아니었다. 비쩍 말라 밥심 세게 생긴 후배였다. 배우 신현준과 비슷하게 생겼는데(신현준이 미남은 아니잖은가) 하여간 밥술 뜨는 속도와 양이 어지간히 탐스럽긴 했다. 다들 질투가 나서 “대체 걔가 왜 그리 좋수” 하고 물었더니 헤벌쭉 웃으며 하는 말이 이랬다. “영민이가 밥을 아주 이쁘게 먹잖어. 을매나 잘 먹는데.”

그와 학창시절 동숙하던 윤성학 시인의 전언에 의하면, 아주 솥밥을 끼고 먹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반찬이 없어서 짠지나 간장 한 종지에도 제법 큰 솥 바닥을 긁었다는 얘기였다. 학교라고 와보면 매일 데모에 수업은 취소되고, 연애는 잘 안되었을 것이며, 졸업하고 먹고살 길은 선배들 보니 암흑 같았을 터이며, 그래서 그는 밥이나 고봉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주변머리에 연애하고 애도 낳을 수 있었던 건 그 어마어마한 밥심과 숟갈질의 매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그 영민이가 시인이 됐다. 나는 시인은 못 되고 문인들의 선후배가 되어 이리저리 팔려가며 밥이나 벌던 시절이었다. 시 같은 것도, 영민이도 잊고 살았다. 어디서 그의 시를 읽었는지 모르겠다. 한 편의 시에 나는 잠시 전율했다. ‘공손한 손’. 밥 먹고 똥 싸는 숙명을 가진 인간사의 척추를 뚜르르 훑는 짧은 말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시의 힘을 부인하지 못하는가 보다. 밥그릇 위에 손을 공손하게 올려놓을 수 있으니 사람이 아직 쓸 만한 세상이라고 애써 자위하게 되는가 보다. 그가 앞으로 어떤 시를 더 쓸지 모르나 이 시로 그는 오래 기억될 게 틀림없다. 버스커버스커보다 그의 시가 더 유효한 건, 벚꽃은 일년에 한 번밖에 못 피어나니까 말이다. 고영민은 아주 교묘한 시인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식당에서 뚜껑 달린 합에 넣어 나오는 밥을 보는 순간 늘 그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울 때는 더 간절해지는 효과가 있다. 일행이 한결같이 손을 내밀어 뜨거운 ‘스뎅’ 밥그릇 위에 손을 올려놓는 광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에 그의 시가 실린 이상, 나처럼 중독자가 무지하게 많이 생겨날 것 같다. 그가 간혹 문자로 전해오는 소식은 그 도시의 계절 술안주다. 문어숙회며 죽도시장의 물회며 구룡포의 과메기 같은 것들. 그가 사주는 따뜻한 밥그릇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의 눈을 보고 싶다. 내가 언젠가 시인 박인환 닮았다고 했더니 동석했던 녀석들이 야유와 함께 ‘맞어, 충청도 박인환’(그는 충남 서산 사람이다)이라고 했던, 제법 잘생긴 얼굴을 보고 싶다.

박찬일 요리사·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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