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주의 시인 송재학
적막 -시집 <날짜들> 수록
빙하가 있는 산의 밤하늘에서 백만 개의 눈동자를 헤아렸다 나를 가만히 지켜보는 별과 나를 쏘아보는 별똥별들을 눈 부릅뜨고 바라보았으니 별의 높이에서 나도 예민한 눈빛의 별이다 별과 별이 부딪치는 찰랑거리는 패물 소리는 백만 년 만에 내 귀에 닿았다 별의 발자국 소리가 새겨졌다 적막이라는 두근거림이다 별은 별을 이해하니까 나를 비롯한 모든 별은 서로 식구들이다
졸시 ‘적막’은 네팔 산간마을의 체험이다. 파키스탄의 훈자에서 본 밤하늘이 시작이긴 했지만 초고였던 ‘적막’은 십 년 동안 숨죽이면서 난드룩의 밤하늘을 기다렸다.
네팔의 산간 마을 담푸스에서 출발하여 꼬박 8시간 걸어 난드룩에 도착했다. 출발하기 전의 들끓는 마음은 몇 시간 지나 산과 길에 적응하면서 단순해지기 시작한다. 산비탈 속속들이 다랑이 밭이니까 촘롱 가는 이 길은 거의 문명과 자연이 서로 깍지끼고 순응한 풍광이기도 하다. 산 아랫자락부터 산정상까지 죄다 다랑이 밭이다. 가축도 자주 보인다. 빼곡한 다랑이 밭들이 꿈틀거리는 느낌은 소의 되새김질처럼 선과 면이 다정하기 때문이다. 선은 간결하고 면은 다채롭다. 손발이 뭉툭하지만 곰살맞은 다랑이 밭 또한 가축의 느낌이다. 밭고랑마다 햇빛이 따사로워 눕고 싶다. 비좁아 서로 부대끼는 가축의 모가지에 풍경(風磬)이 매달렸다. 산비탈을 물들이는 계절의 색조, 빛과 색이 일치하는 산색이다. 올해의 풍년을 따지는 귀갑문이 다랑이 밭과 가축의 등에서 균열을 시작한 것도 보인다. 그리하여 종일 걸어서 도착한 곳이 난드룩이었다.
난드룩의 로지가 반가운 것은 첫날의 숙박지이기 때문이겠다. 저녁을 먹고 로지의 마당에 앉아 차를 마신다. 노을이 시작된다. 북해의 거대한 곤(鯤)이 변하여 붕(鵬)이 되었고 다시 변하여 첩(鯜)이니, 흔히 우리가 노을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짐승의 내부인지 외부인지 여기서는 분명치 않다. 꾸역꾸역 붉어지는 서쪽 하늘의 비린내도 싫지 않다. 계곡 건너편 산록의 마을은 간드룩이다. 간드룩의 ㄱ과 난드룩의 ㄴ이 나란하여 짝이 된다. 간드룩 역시 해발 1500여 미터의 산간 마을이다. 간드룩에게 난드룩은 계곡 건너편 마을이다. 아마 간드룩은 난드룩이 없었다면 그냥 흔한 마을이고 말았을 터인데 난드룩이 있었기에 두 마을은 옹기종기 삶을 얻는다. 마당의 어스름 속에서 별이 돋아나는데 지상의 불빛이 먼저이다. 처음 그 별은 간드룩의 어느 집 마당에서 히말라야바람꽃처럼 깜빡 졸기 시작했는데 결국 하늘의 별들과 같은 마당을 사용했다. 밤하늘이 넓어졌다. 팔다리가 없는 별이 별빛으로 서로 포옹하는 평화가 넓어졌다. 문득 마음껏 달리는 별똥별이 밤의 모서리에 빗금을 긋는 평화 속의 난드룩은 내가 오래전에 도착한 곳, 또는 내가 오래전에 태어난 해발 1500여 미터의 히말라야 마을처럼 여겨진다. 난드룩에서 간드룩으로 시집간 처녀와 시집온 처녀가 올망졸망 몇 대를 넘나들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드룩 마을이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경사가 심한 개울물을 이용한 발전기 덕분이다. 사람들은 처마 밑 전등을 밤새 켜놓는다. 더 많은 별은 풍년의 약속이기에 별빛과 전깃불을 구별하지 않는다. 별빛이 전깃불을 토닥거리는 것처럼 난드룩과 간드룩이 바람이나 구름이나 여하간 무언가의 손바닥을 빌려 밤새 서로 토닥거리는 풍경은 흔하디흔하다.
새벽에 잠이 깨어 밖으로 나왔다. 설산들이 희고 검은 얼굴을 하고 무너지듯 치솟아 나를 덮쳤지만 꼼짝할 수 없었다. 밤하늘이 보여주는 백만 개의 눈동자와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별과 별똥별들은 예민했고 나도 밤하늘에 민감해졌다. 서로 감정을 섞어서 긴장하는 대치 상태이다. 먼저 별과 별이 부딪치는 금은의 소리가 내 심장에서 들리고 별과 내가 부딪치는 소리 혹은 나와 별이 부딪치는 패물 소리도 순서 없이 들렸다. 별의 발걸음 소리가 아니라 별의 발소리이다. 흔적을 남기는 무거운 소리이다. 적막이란 소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너무 거대했기에 임계를 지나버린 것이다. 적막은 우주로부터 온 소리가 바탕이다. 별을 이해하는 것들 혹은 별들이 모두 같은 공간에 모인 셈이다. 설산과 별들의 새벽 풍경은 초월의 감정이다. 그렇게 몇 시간을 보내자 아침이 왔다. 나뿐만 아니라 마당에는 일행들이 모두 그렇게 물끄러미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렇게 졸시 ‘적막’은 내 안으로부터 세상 밖으로 나왔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원래 우리에게 존재했던 감정이다.
송재학
*1986년 계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얼음시집> <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등을, 산문집으로는 <풍경의 비밀> <삶과 꿈의 길, 실크로드>를 냈다.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경
송재학은 풍경의 고고학자이며 철학자다. 송재학은 풍경의 궁극과 궁극의 풍경에 닿고자 한다. 그것은 어떤 시공간을 잘라낸 단면의 그림이 아니며, 생생하고 입체적인 모사(模寫)의 이미지의 총합도 아니다. 송재학이 필사하는 풍경은 아득한 시원으로부터 흘러와 다시 아득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두께와, 우주의 끝에서 끝에 이르는 공간의 넓이를 갖고 있으며, 그가 ‘검은색’이라고 부르는 대자연의 섭리로서 심연의 깊이를 간직하고 있다. 가령, 모래 한 알과 바람 한 자락도 우주 전체의 서사를 제각기 응집하고 있으며, 그 정점의 한 지점을 온전히 살아내는 중에 있다.
송재학이 우주 전체의 서사와 운동성을 품은 풍경들을 그리는 데 사용하는 도구는 “뭉클하고 도저한 필기구인 생(生)”이다(‘낙엽 밟기는 밟는다만’). 아무리 오래고 드넓은 우주적 연대 속에서도 모든 생명체에게는 홀로 감당해야 할 생멸과 고독의 몫이 있다. 송재학은 저마다의 갈급하고 쓰라린 ‘생’을 압착한 염료로, 지상과 허공, 탄생과 적멸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운동하는 존재와 세계의 풍경을 그린다. 푸른색, 붉은색, 흰색, 초록, 분홍, 검은색 등은 송재학이 자신과 타자들의 생을 원료로 하여 추출한 존재적 염료의 이름이며, 삼라만상의 근원이 되는 우주적 질료의 이름이다. 송재학의 ‘색’은 그가 시적으로 구사하는 고대로부터 현재까지의 다양한 언어와 화법(畵法)의 근본 재료가 되는 것으로서 우주의 실재를 의미한다.
‘색’과 함께 송재학이 통찰한 우주의 실재는 ‘적막’이다. 소리가 가청의 음역을 벗어난 차원인 ‘적막’은 모든 사물과 현상에 헤아릴 수 없는 깊이를 부여한다. 송재학의 시는 “고요의 음역(音域)”을 섬세하게 구별하고 기록하며(‘나무의 대화록’), 이로써 적막한 “허공을 실천”(‘공중’)하는 중에 있다. 송재학이 근원의 색과 소리(적막)를 언어로 번역하는 불가능한 작업을 마다하지 않은 덕에 우리시는, 우주의 원리이자 질료로서 더할 수 없이 깊은 ‘색’(色)과 ‘적막’으로 이루어진 풍경을 갖게 되었다.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풍경을.
김수이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