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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윤동주는 ‘최후의 나’를 향해 갔다

등록 2016-04-01 20:45수정 2016-04-02 10:56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
‘사랑스런 추억’과 ‘쉽게 씌어진 시’ 함께 읽기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艱辛)한 그림자를 떨어뜨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주어,

봄은 다 가고 ─ 동경(東京)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1942.5.13.)

“조금 아는 것은 위험한 것이다. 깊이 마시지 않을 거라면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보지 말라.” 알렉산더 포프의 장시(長詩) ‘비평에 대한 에세이’(An Essay on Criticism, 1709)의 215~216행이다. 조금 아는 사람이 위험한 것은 그가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이 아는 사람은 자신이 알아야 할 것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을 안다. 이어지는 대목이 이렇다. “얕은 한 모금은 뇌를 취하게 만들지만, 많이 마시면 다시 명철해지리라.”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이젠 좀 알겠다 싶으면 당신은 아직 모르는 것이고, 어쩐지 점점 더 모르겠다 싶으면 당신은 좀 알게 된 것이다.

학문과 예술에 입문한 사람들이 새겨야 할 말이지만, 어떤 대상(사람)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도 떠올려야 할 말이다. 당신은 윤동주를 아는가? ‘조금 아는’ 사람만이 ‘잘 안다’고 단언할 것이다.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우리 잘못만은 아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윤동주의 시를 배웠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 깔려 있는 기독교적 윤리감각과 자기 성찰적 태도와 부끄러움의 정서와 저항시적 성격을 외워야 했다. 우리는 인생의 어느 한 시점에 스스로 윤동주를 발견하고 대화하고 감동받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럴 기회를 박탈당했다. 조금 알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국문학과 학부를 다니는 동안 윤동주의 시를 읽은 기억이 없다. 대학원에 진학해서야 그를 다시 읽었고, 그의 아름다운 시 ‘병원’을 뒤늦게 발견했으며, 내가 윤동주를 잘 몰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또 한동안 잊고 지내다 최근에 다시 <정본 윤동주 전집>(홍장학 엮음)을 꺼내든 것은 역시 영화 <동주> 때문이다. 신연식의 각본과 이준익의 연출은 훌륭했다. 일본 도착 이후 체포될 때까지의 시기에 대해서라면, 사실 관계는 거의 밝혀져 있지만 그의 내면 공간이 어떠했는지는 미지로 남아 있는데, 이 영화는 그 시기 그의 내면에 깊이 있는 주석을 다는 데 성공했다.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나대로 그 시기의 윤동주에 대해 생각한다. <윤동주 평전>(송우혜)과 <처럼>(김응교) 등에 따르면 윤동주는 1942년 3월 부산을 떠났고 4월2일에 도쿄 릿쿄(立敎)대학에 입학했다. 그가 일본에서 쓴 모든 글은 이듬해 7월에 체포되면서 망실됐다. 친구 강처중에게 띄운 편지에 적어 보낸 다섯 편의 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윤동주가 도쿄에서 교토로 거처를 옮기고 “재(在) 교토(京都)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에 가담하기까지의 내면의 추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직 저 시들을 읽고 또 읽을 수밖에 없다. 저 마지막 다섯 편 속에 ‘사랑스런 추억’과 ‘쉽게 씌어진 시’가 들어 있다.

‘사랑스런 추억’이 아름답기는 해도 중요한 작품은 아닌 것일까. 그리고 ‘쉽게 씌어진 시’와는 동떨어진 작품일까. 흔히들 그렇게 말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화자는 봄이 다 간 도쿄에서 봄이 오던 무렵의 서울을 생각한다. 서울에서의 어느 날 나는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희망도 사랑도 없었다는 뜻이다. 무슨 “새로운 소식”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느덧 지금은 도쿄에 와 있다. 6~7연에서 도쿄의 나는 서울의 나를 눈앞에서 보듯 떠올리고 있다. ‘오늘도 기차는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겠지.’ 이제 와 돌아보니 그곳의 내가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진다.

그저 유학 초기의 향수병을 노래한 시가 아니다. “봄이 오던 아침”과 “봄은 다 가고” 사이의 시간, 그러니까 기껏해야 2~3개월이 흘렀을 뿐이다. 두세 달 전의 내가 왜 그립기까지 한가. 그 사이 내 안에서 무언가가 결정적으로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래서 ‘지금의 나’는 ‘여기’에 있지만 ‘그날의 나’는 여전히 ‘거기’에 있다는 발상이 나왔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불과 2~3개월 만에 늙어버린 내가 몇 달 전의 나에게 애틋한 작별 인사를 건넨다. 불가피하게 떠나와야 할 과거의 나인데, 막상 떠나려 하자 눈물겹게 그립다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가 불길하다. 윤동주는 어디로 가려는 것일까.

잇달아 쓰인 ‘쉽게 씌어진 시’에 그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두 연을 옮긴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그러니까 윤동주는 “최후의 나”를 향해 간 것이다. 최초의 나 이후로 여러 나를 살아왔지만 그것은 여기까지 오기 위한 과정이었고 이제 더는 바뀔 수 없는 내가 되었다는 뜻이리라. ‘최후의 나’라는 말에는 자책과 자부가 아프게 엉켜 있다. 우리는 그가 얼마나 부끄러워했는지를 안다. 그러나 그 부끄러움을 이겨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해서도 잘 아는가.

이 “최후의 나”가 탄생하면서 “최초의 악수”가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이 악수는 “내가 나에게” 하는 악수다. “최초의 악수”라고 했으니 그 이전에는 악수를 한 적이 없었다는 말이다. 부끄러워만 했던 시절의 윤동주는 자기 자신을 한 번도 온전히 긍정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최후의 나’가 탄생하여 ‘직전의 나’에게 손을 내민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고, 이제 너는 부끄럽지 않아도 된다고. 또 ‘직전의 나’는 ‘최후의 나’에게 말했을 것이다. 네 앞날이 걱정스럽다고, 그러나 네가 자랑스럽다고. 이 새벽의 악수에 어찌 “눈물과 위안”이 없을 수 있었을까.

윤동주의 ‘최후의 나’는 등불을 들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고 1945년 2월16일에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죽었다. 그는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어정쩡한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도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는 시를 쉽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을 어렵게 살았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노력, 결국 ‘최후의 나’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것이 그를 죽게 했고 영원히 살게 했다. 나는 그의 문장을 반대로 뒤집어 나에게 읽혀야 한다. ‘시는 쓰기 어렵다는데 인생이 이렇게 쉽게 살아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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