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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원시(原始)는 시원(始原)이다

등록 2016-04-01 20:48수정 2016-04-02 10:56

정해종의 시 밤의 노래 : 도시
밤의 노래 : 도시 데니스 브루터스

잘 자라, 내 사랑이여, 잘 자라
항구의 불빛은 어수선한 선창 위에 번뜩이고
경찰차는 굴다리를 지나 시내를 바퀴벌레처럼 쏘다니고

판잣집에는 삐걱이는 철판
폭력은 벌레 먹은 누더기처럼 굴러다니고
공포는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처럼 심중에서 끓고

기나긴 하루의 노여움은 모래와 바위에서 가쁜 숨을 쉬고
하지만 적어도 이 숨 쉬고 있는 밤을 위해
나의 땅, 나의 사랑이여, 잘 자라.

* 데니스 브루터스(Dennis Brutus)
1924년 로디지아(짐바브웨)의 수도 솔즈베리(하라레)에서 출생. 남아공의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침. 1961년에 해임된 뒤 모든 집회의 참가 및 시집 출판이 금지됨. 당국과의 빈번한 마찰로 체포되었으나 보석기간에 해외로 탈출, 후에 다시 경찰의 총을 맞고 체포되어 악명 높은 정치범 수용소인 로벤 섬 감옥에 투옥됨. 시집으로 <사이렌, 주먹, 군화> <마사에서 보내는 편지> <알지에 시편> <소박한 욕망> 등이 있다.

세상일에 관심 없다는 듯 철없이 푸르기만 한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의 하늘로 92개의 대형 풍선이 날아오른다. 울긋불긋하게 치장한 인파 속으로 92킬로그램의 거대하고 화려한 케이크가 등장하고 수천명의 학생들이 한목소리로 한 사람을 찬양한다. 지난 2월21일 92회 생일을 맞은 현존하는 세계 최고령 통치자이며 집권 37년차를 맞고 있는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축하파티의 한 장면이다.

약 1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치자의 생일파티를 벌인 이 나라는 현재 극심한 가뭄으로 주식인 옥수수가 말라비틀어져 국민 네 명 중 한 명꼴인 300만명가량이 식량 위기를 겪고 있는 아프리카 최빈국 중 하나이다. 이날 파티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연설했다. “우리는 국민을 먹여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이 힘든 시기를 분명하게 극복할 것이다.”

이 나라에는 종종 상식 밖의 일들이 일어난다. 한 진보 신문사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화폐를 이어 붙여 제작한 대형 옥외광고판에 이런 카피가 달린 적이 있다. ‘로버트 무가베 대통령 덕분에 이 돈을 광고에 쓸 수 있었다.’ 이 광고에 사용된 화폐는 총 2억5천만 짐바브웨 달러, 그러나 광고용 종이는 3억 짐바브웨 달러가 넘었다. 이는 부패한 군사정권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한 촌철살인의 조소이며 비장한 항거의 표현이었다.

지난 37년 동안 이 기이한 정권이 유지되기 위해선 많은 희생물이 필요했다. 언론은 통제되고 자유는 속박되었으며, 무지렁이 같은 백성들이 굶주렸고 선거철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이 시를 쓴 데니스 브루터스는 무가베와 같은 해에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으나, 남아공으로 건너가 법률을 공부하고 교육가이자 저널리스트, 반체제 시인으로 투옥과 망명으로 점철된 생을 살았다. 그가 살았더라면 어딘가에서 조촐한 92회 생일을 맞겠지만 그는 죽고 없다. 시는 그가 한창 아파르트헤이트에 저항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당시의 남아공은 16%의 백인이 나머지 비백인(非白人)을 통치하는 악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을 시행했다. ‘경찰차가 시내를 바퀴벌레처럼 쏘다니고’, ‘폭력은 벌레 먹은 누더기처럼 굴러다녔으며’, ‘공포는 바람에 흔들리는 종소리처럼 심중에서 끓는’ 일상이 지속되었다.

시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칠흑 같은 현실을 묘파한다. 그러나 ‘이 숨 쉬고 있는 밤’이란 구절을 삽입함으로써 한 줄기의 빛 같은 생명을 불씨를 지피고 있다. 부당한 권력은 끝나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자유와 존엄에 대한 투쟁은 영원하리라는 암시일 것이다.

정해종 시인·박하 대표
정해종 시인·박하 대표
일찍이 서구는 아프리카를 원시의 세계로 해석했다. 자신들이 속한 세계가 문명의 정점이라는 오만한 판단에 더하여 아프리카를 그 대척점으로 상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원시(原始, primitivity)는 글자 순서만 바꾸면 시원(始原, origin)이 된다. 인류의 유전자가 담겨 있는 기원의 대륙이며 숭고의 땅이다. 당당히 이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존엄의 대상인 것이다. 나는 아프리카를 그렇게 읽는다.

정해종 시인·박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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