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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초원의 혼불

등록 2016-04-08 20:25수정 2016-04-08 20:25

김병학의 시 말에 대한 묘사
말에 대한 묘사 아바이 쿠난바이울리

짙은 앞머리와 갈대 같은 귀를 가지고
긴 목과 흘겨보는 눈길은 정녕 야성적이어라.
드센 목덜미와 명주 같은 갈기,
목덜미 아래에는 큰 보조개가 있구나.

콧구멍은 넓고 입술은 크고 두툼하며
또 척추는 산줄기마냥 강하구나.
살진 근육으로 장난치며 가슴도 넓어
먹이를 포획한 매 마냥 억세고 거칠어라.

점토지대처럼 고르고 둥그런 말굽에
넓게 벌려 드리워진 종아리,
경쾌한 긴 다리로 걸음을 내딛는데
어깨뼈는 세상처럼 넓기도 하지.

갈라진 궁둥이, 오목한 몸통, 넓은 옆구리는
아무리 봐도 말안장에 제격이로구나.
메마르고 짧은 꼬리엔 뻣뻣한 털,
꼬리 밑은 불룩하고 튼실하게 살이 쪘구나.

낮은 복사뼈와 네모난 살덩어리,
잘 뛰고 튼튼한 둥근 엉덩이 좀 보게.
배 밑은 반듯하고 얇고 홀쭉한데
다리 사이에 눌려있는 통통한 고환주머니.

뼈마디는 유연하고 종아리는 넓어라
달릴 때는 바람처럼 경쾌하여라.
나는 그를 붙잡아 천막에 매어두고 싶네,
그가 눈을 흘기는 걸 홀로 보며 즐기려고.

그는 초원이 분노하도록 이를 갈며
곧장 달리고 그 주력은 빠르고 강하지,
경주에선 경쟁적이지만 달릴 땐 충직하고,
이런 말이 없다면 망신 아닌가.

말은 어찌나 빠른지 털모자가 치솟고
꾀꼬리처럼 절로 하늘을 오른 듯하여라.
이 귀한 말 타타르 산양보다 빨라
이것만 생각하면 기분이 나른해진다네!…

튼실하게 살이 찐 말떼가 부드러운 바람을 일으키며 광야를 질주하는 오월에는 광활한 카자흐스탄 초원이 새빨간 개양귀비꽃으로 핏물이 든다. 대기근으로 비쩍 마른 말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격정적으로 회오리를 일으키며 내달리는 동지섣달에는 온 천지가 어두운 구름의 공격에 휩싸인다. 거기에는 현존의 기쁨과 고통만 가득하다. 실존적 두려움이나 희망 같은 단어들은 끼어들 틈이 없다. 초원의 말들은 유목민을 등에 태운 채 또 태우지 않은 채 문명의 경계를 아스라이 넘나든다.

유목민에게 말은 더없이 소중한 친구다. 그들에게는 말과 친하다 못해 켄타우로스(머리는 사람이고 몸은 말인 신화적 동물)로 결합되어버렸다는 표현이 더 영예로울 것이다. 말의 충실성에 대한 믿음은 중앙아시아 대표적 유목민인 카자흐인의 유목 반경 내에 들어 있던 서시베리아와 코카서스(캅카스) 등지에까지 널리 퍼져 있다. 현대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작가들은 조상들이 늘 그랬듯이 말을 분신처럼 여기고 모든 장르의 작품에 말을 주요 소재로 등장시켰다. 그들은 모두 이 시의 저자인 아바이 쿠난바이울리(1845~1904)의 정신적 후예임을 자처한다.

아바이는 카자흐스탄의 탁월한 국민시인이자 계몽가이며 사상가로서 카자흐인들에게는 영국의 셰익스피어, 독일의 괴테, 러시아의 푸시킨 같은 존재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후반은 그보다 한 세기 전 제정러시아가 낯선 문명을 가지고 카자흐 유목전통에 개입해 들어온 이래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적 모순이 격심해지던 시기였다. 러시아는 미래에 존재의 근거를 두고 현재로 넘어와 유목문화를 위협했다. ‘(미래) 시간이 다가오다’란 구절이 러시아어로는 ‘(미래) 시간이 (군대처럼) 진격해오다’라고 표현되듯이 러시아의 초원 진출은 유목민에게 새로운 시간의 습격, 거대한 희망과 두려움의 시작을 뜻했다.

아바이는 유목전통의 취약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의식이 순환적 시간에 갇혀 충분히 깨어나지 못한, 인류 의식진화의 초기 단계에 나타나는 것이었다. 미래세계에서 불어오는 회오리 앞에 위태롭게 흔들리는 초원의 혼불을 새롭게 지피려면 고통스러운 변용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는 유목민 전통의 ‘아킨’(음유시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바람의 노래를 문자로 ‘기록’하는 시인이 되었다. 그러고는 동족의 졸렬함과 나태함을 준엄하게 꾸짖고 자기를 성찰할 것을 줄기차게 외쳤다. 이로 인해 적대자들로부터 무수한 모함과 폭행을 당하고 자식들을 먼저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유목의 전통 위에 러시아와 서구의 근대사조, 고대 페르시아의 지적 자산, 무슬림의 신심, 특히 수피즘의 영성을 녹여내어 카자흐 역사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시문학의 산을 쌓아올렸다.

 김병학 작가·시인
김병학 작가·시인
이 시는 유목민이 아니라면 결코 표현할 수 없는 말에 대한 세밀화다. 그렇지만 조금도 유약하지 않으며 호방한 유목민의 기상이 유감없이 드러나 있다. 아바이의 시들은 모두 준마처럼 빠르고 힘이 세다. 그가 땅 위에 풀어놓은 말떼(시편과 시어들)는 초원에 꽃을 피우고 세상을 놀라게 해주었다. 말들은 격정적이고도 부드럽게 초원을 질주하다 주인과 함께 카자흐스탄 창공으로 비상하여 ‘툴파르’(하늘을 나는 말)가 되었다.

김병학 작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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