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이데아 서태지 작사 작곡·서태지와 아이들 노래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우릴 덥석 모두를 먹어삼킨
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겉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본얼굴은 가린 채
근엄한 척할 시대가 지나버린 건
좀 더 솔직해봐 넌 알 수 있어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젠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 (족해)”
22년 전인 1994년 여름, 북청사자놀음처럼 좌우로 어슬렁거리는 힙합 특유의 지신밟기를 하며 이렇게 외친 건 다름 아닌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서태지가 ‘됐어’ 하고 선창하면 아이들은 ‘됐어’ 하고 받는다. 서태지가 ‘족해’ 하면 아이들은 ‘족해’ 하고 따라 한다. 이 노래, ‘교실 이데아’의 ‘됐어’ 부분은 당시 십대로 구성된 미국의 힙합 듀오인 크리스 크로스의 ‘라임의 길’(The Way of Rhyme)에 나오는 ‘댓 욜’(That y’all) 하고 비슷해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 관점에서 들으면 ‘됐어’는 ‘옹헤야’나 마찬가지다. 메기고 받는 노동요의 형식이다. 힘겨운 아이들의 어깨동무다.
아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한다는 것이다. 서태지가 메기면 아이들이 받는다. 받는 역할을 대표하는 건 ‘아이들’인 이주노와 양현석이다. 그 아이들을 따라, 가사에 나오듯, 전국 900만의 아이들도 ‘됐어’와 ‘족해’를 정확하게 받아준다. 메기고 받는 이 신나는 놀이에 전국의 아이들이 동참한다. 한국 팝문화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한 불신을 토로하는데 모두 웃는 낯이네? 메탈 사운드로 으르렁대는데 힙합 비트로 웃고 노네? 서태지식 하이브리드다. 거참, 이런 게 민주화의 효과로구나. 어른들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웃었다. 허허. 처음엔 그랬다.
우리말의 ‘됐어’는 이상한 말이다. 어감에 따라 정반대의 뜻이 된다. ‘드디어 성공!’이라는 뜻도, ‘그만 좀 해’라는 뜻도 된다. 대개 ‘됐어’는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거기에는 체념과 조롱이 담겨 있다. 사실 이 ‘됐어’는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한국 교육현장의 본모습이다.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하라는 대로 하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한국 교육은 숫자놀음이다. 정량적 지표를 따기만 하면 ‘됐다’고 본다. 중고등학교는 말할 것도 없고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갑질을 당하든 말든, 전공을 살리든 말든, 취업률 높인답시고 형식적으로 아무 데나 취직시키면 ‘됐다’. 연구실적 올린답시고 말이 되든 말든 논문 써서, 제자가 썼든 말든 베껴서 학회지에 올려서 점수만 따면 ‘됐다’. 엠에스지(MSG)를 갖다 붓든 소금을 들이퍼붓든 기준만 맞추면 급식도 ‘됐다’. 실제로 좋아서 활동하든 말든 참여했다는 도장 받아서 학생부에 올리기만 하면 동아리 활동도 ‘됐다’. 영어를 입으로 구사할 줄 알든 모르든 토익 점수만 챙기면 ‘됐다’. 인간은 어떻게 되든 말든 교육부 방침에 따라 지표만 맞추면 구조조정 당하지 않고 지원금도 챙기니 ‘됐다’. 그걸로 족해. 누리과정 예산을 나중에 누가 내든 말든 일단 공약으로 짖어서 표만 따면 ‘됐다’. 한국에서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기관은 기관이 아니다. 교육기관은 기업 인수 합병 기술자나 헤드헌터들의 수법을 버젓이 쓴다. 한마디로 야바위꾼들이 기관을 이끌어 간다. 진짜 그걸로 됐다. 이 시스템은 여전히 지긋지긋하다.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태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가올 신자유주의 체제가 아이들을 어떻게 길들이는지를 똑똑히 알려준다. 케이팝 어쩌구 하는 ‘생존’ 경쟁 프로그램(프로그램 이름에 ‘서바이벌’, 즉 ‘생존’이라는 무시무시한 단어가 들어 있다)을 보라. 노래 꿈나무들이 연예계 대기업 총수들 앞에서 면접을 본다. 총수들은 애정이 묻어나는 말투로 아낌없는 조언을 한다. ‘좀더 비싼’ 너로 만들어 준다. 그 사장님들이 걔네들을 자기 회사에 입사시킨다. 이런 상황 설정이 그 어떤 강요보다도 효과적으로 아이들을 이 사회의 시스템에 길들인다. 왜냐하면, 한 번 더 얘기하지만,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따라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900만에서 680만으로 줄어든 전국 모든 아이들에게 ‘너희들도 그래야만 해’라는 주문을 걸고 있는 것이다. 아. 너무나도 끔찍한 방식이다.
1994년 9월7일 한국방송(KBS) 가요톱텐에 나온 ‘교실 이데아’의 공연 장면에는 공사용 사다리가 소품으로 등장한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서태지는 그 사다리를 밀어 넘어뜨린다. 이때가 이 무대의 절정이다. 더 이상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다리를 타고 당신네 세계로 진입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객석의 아이들은 문화 대통령의 그런 퍼포먼스에 환호성과 박수로 아낌없는 지지를 보낸다. 이쯤 되면 이 ‘됐어’가 위험해 보인다. 이때부터 음모가 작동한다. 음모는 늘 전혀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물꼬를 튼다. 그게 기술자들이 쓰는 방식이다. 절대로 없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있는 구멍을 파고드는 구더기와도 같다. 누군가 ‘교실 이데아’의 특정 부분을 거꾸로 돌리면 ‘피가 모자라’로 들린다는 소문을 퍼뜨린다. 논쟁이 불붙는다. 이상하게 기독교가 꼭 따라붙는다. 전국이 ‘피가 모자라’로 들썩인다. 9시 뉴스에까지 등장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이 예상치 못한 동요에 당황한다. ‘됐어’의 파티를 생각보다 일찍 접기로 한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
1994년 7월24일 서울 38.4도. 지금도 이 최고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다. 숨막히게 더웠다. 그러나 그 숨막힘은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해 봄이 이상했다. 3월에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오더니 남북한은 차표를 예약이라도 해놓은 듯 전쟁열차에 함께 올라탔다. 4월은 록 청년들에게 가장 잔인한 달이었다. 얼터너티브 록의 영웅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것이다. 왜 그런지 그런지(grunge) 했다. 6월이 되어 전쟁공포는 절정에 이르렀다. 어른들은 라면을 박스로 사서 집 안에 쟁였다. 이 상황은 우습게 뒤집어졌다. 카터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고 오더니 돌연 공포는 통일의 장밋빛 꿈으로 변해버렸다. 그러나 정상회담을 보름 남짓 앞두고 김일성이 세상을 떠났다. 또다시 반전이었다. 꿈은 한순간에 거품처럼 흩어졌다. 이만하면 됐다, 싶던 8월에 ‘교실 이데아’가 나와서 ‘됐다’고 외쳤다. 답답했다. 여러모로 김빠진 맥주 같은 가을이다 싶을 때 성수대교가 무너졌고, 한 3개월 이어지던 ‘됐어’는 잦아들었다. 됐어는 그렇게 돼버리고, 말았다.
성기완 시인·밴드 3호선버터플라이 멤버·계원예술대학교 융합예술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