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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멈출 수 없는 혁명

등록 2016-04-22 21:19수정 2016-04-23 14:12

구광렬의 시 기록 Ⅱ(Nota Ⅱ)
기록 Ⅱ(Nota Ⅱ) 후안 헬만

난 이미 내일 죽었거든
난 그저께 죽을 거야
날카로운 칼로
76을 파버릴 거야
파코의 뿌리를 깨끗이 하기 위해
파코의 잎새를 깨끗이 하기 위해
망가진 노새처럼 땅에 박힌
날 도와주려 했던 사람들,
후에 77이 되고
로돌포의 눈들을 만나기 위해
지금은 텅 빈 시선들,
뼈를 씻어야 할 거야
사라지는 그림자완 거래를 하지 않을 거야
가슴, 뼈 위에 뿌려지는 흙,
차가운 땅바닥에 누인
친구들이여, 용기를 다오
그림자들이 주위를 날아다니는구나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 몸 어느 부분을
멈추게 할 순 없지
심장도
낱말도
친구들이여

1976년 쿠데타로 집권한 호르헤 비델라(1925~2013)는 아르헨티나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의회를 해산시키고 법관의 80%를 군인으로 교체한 군사평의회(Junta)는 일부 중요한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키곤 무구한 시민들을 연행, 투옥, 고문하고 사형시켰다. 명분은 좌익 게릴라 척결이었지만, 실질은 반대세력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리오 데 라 플라타. 스페인어로 은(銀)의 강이란 뜻이다. 은빛 물결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카리브 해로 흘러들어가는 강구에 수만명을 수장시켰던바, 지금은 은퇴한 한 해군 조종사의 ‘비행’이란 제하의 고백서에 의하면 그가 복무했던 공군기지에 매주 수요일 수십명의 희생자들이 실려 왔으며, 자신의 부대에서만 최소한 2천여명이 던져졌다는 것이다. 마약을 먹인 뒤 발가벗겨 비행기에서 떨어뜨렸던바, 임신부는 뱃속 아기를 꺼낸 뒤 던져졌으며, 아기들은 강제입양 당했다. 그녀들 중에는 시인의 며느리, 마리아 클라우디아도 끼어 있다. 그녀는 카리브 해의 물고기 밥이 되었으며, 적출된 아기는 우루과이에 입양되었다. 하지만 영화의 한 장면처럼 20여년이 지난 2000년 말, 그 외손녀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외할아버지를 만날 수 있게 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에는 이름하여 ‘오월광장’이 있다. 지금도 실종자 가족들은 머리에 흰색 수건을 두른 채 자식을 돌려달라며 침묵의 원(圓)을 그린다. 그녀들이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가족모임인 ‘오월어머니회’의 모태인 ‘오월광장어머니회’ 회원들이다. 2011년 1월 초 필자는 교육방송 세계테마기행 촬영차 그곳을 찾은 바 있다. 그들과의 면담을 끝내고 곧장 달려간 곳이 신공항 부근에 위치한, 군정 시절 헌병대였던 사관학교다. 담벼락엔 설치예술품들이 걸려 있었다. 에칭으로, 판화로, 그림으로, 조각으로, 젊디젊은 희생자들이 그려지고 새겨져 있었으며, 그중에는 파코(Paco) 같은 열네 살 소년도 끼어 있었고, 디아나(Diana) 같은 열아홉 임산부도 끼어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 설치물들엔 벌건 녹이 슬어 있어 피를 흘리는 양 처연해 보였다.

1976년은 아르헨티나의 국치년이다. 이미 아르헨티나인들은 “내일 죽었으며, 그저께 죽을 목숨”이었다. 희생자들의 서러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시인은 “날카로운 칼로 76”을 파버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의 뿌리와 잎새”를 위해서라도 시인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멈출 수 없는” 혁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구광렬 시인·소설가
구광렬 시인·소설가
시인과의 첫 만남은 1997년 봄날 이뤄졌다. 필자의 또 다른 친구인 사울 이바르고옌 시인이 고문으로 있던 멕시코 일간지 <엑셀시오르>(Excelsior) 편집국에서였다. 1930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남미의 대표적 저항시인이다. 각자의 조국인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에 민주정부가 들어섰건만 멕시코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보내고 있다. 사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만하면 멕시코도 조국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후안에게 물었더니, 더 괴짜로 답했다. 멕시코엔 바이올린 심장을 뜨겁게 연주해 줄 여인이 있다는 것이었다. 저항시인들의 답치곤 알량하게 들리지만, 그들만의 여유 있고 이유 있는 저항 방식에서 도출된 명답일 수도 있다.

구광렬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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