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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셰익스피어가 옳다

등록 2016-04-29 19:48수정 2016-04-30 15:15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
-400주기에 읽는 소네트 73
소네트 73 윌리엄 셰익스피어

한 해 중 그런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
전엔 예쁜 새들이 노래했지만 이젠 황폐한 성가대석,
추위를 견디며 흔들리는 그 가지들 위에
누런 잎들 하나 없거나 거의 남아 있지 않은 계절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해가 진 후
서녘에서 스러지는 그런 날의 황혼을,
만물을 휴식 속에 밀봉해버리는 죽음의 분신인
시커먼 밤이 조금씩 앗아가는 황혼을.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 불타오르게 해준 것에
다 태워져, 꺼질 수밖에 없는
임종의 자리처럼, 제 젊음의 재 위에
누워 있는 그런 불의 희미한 가물거림을.
그대가 이것을 알아차리면 그 사랑 더 강해져,
그대가 머지않아 잃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되리라.

윤준 엮고 옮김, <영국 대표시선집>(실천문학사, 2016)

셰익스피어가 소네트를 단 한 편도 쓰지 않았더라도 그는 위대한 시인이다. <햄릿>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영미문학연구회에서 가장 훌륭한 판본 중 하나로 선정한 1954년판 최재서 역본은 이를 “살아 부지할 것인가, 죽어 없어질 것인가, 그것이 문제다”로 옮겼다)로 시작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이 독백에는 운(韻, rhyme)이 없지만 이것이 시가 아니라면 무엇일까. 최근 출간된 훌륭한 앤솔러지 <영국 대표시선집>(실천문학사)의 셰익스피어 파트에 이 독백이 포함돼 있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 그가 소네트를, 그것도 154편이나 썼으니, 이것은 한 인간이 후대의 인류에게 남긴 아름다운 선물이다.

그런데 그 선물을 풀어서 읽어나가다 보면 당황하게 된다. 사랑에 빠진 자의 달콤한 고백을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결혼적령기에 이른 어느 청년에게 빨리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라고 충고하는 시인의 목소리만 내내 들려오기 때문이다.(적어도 17번까지는 그렇다.) 저간의 사정에 대해서는 셰익스피어 400주기를 맞아 때마침 번역된 명저 <세계를 향한 의지>(민음사)에서 스티븐 그린블랫이 흥미로운 설명을 들려준다. “셰익스피어는 왜 1592년 여름, 한 부자 청년의 결혼을 재촉하는 시를 써 달라는 의뢰를 기꺼이 받아들인 것일까?”(407쪽) ‘전염병 때문에 극장이 문을 닫아 수입원이 막혔기 때문’이라는 것이 답이다.

그러니까 생계형 원고였다는 말이다. 자기애가 강한 아름다운 청년이 결혼을 거부하자 속이 탄 가족들이 그의 마음을 돌려놓기 위해 셰익스피어에게 ‘1인용 작품’의 창작을 의뢰했던 것. 그래서 셰익스피어는 ‘당신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을 영원한 것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자손을 남겨야 한다’는 요지의 작품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린블랫에 따르면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벌어진다. 청년의 아름다움을 찬미하다가 시인 자신도 그 청년에게 매혹돼 버린 것. 하여 셰익스피어는 ‘시인인 내가 나의 언어로 당신의 아름다움을 기려 불멸이 되게 하리라’라는 요지의 작품들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연애의 중개자가 그 연애에 얽혀 들어가듯 말이다.

18번 소네트부터가 그렇다. “그대를 여름날에 견주어 볼까요? 그대가 더 사랑스럽고 온화하지요.” 154편 전체 중에서도 가장 많이 애송되는 이 시는 그러니까 여성이 아니라 남성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여기서부터 소네트는 아름다운 청년에게 구애하는 어느 남성 시인의 노래가 된다. 적어도 127번에서부터 등장하는 정체불명의 여성 ‘다크 레이디’가 이들과 삼각관계를 형성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물론 소네트 전체의 맥락과 구조가 이렇게 복잡하다 할지라도 우리가 여기에 얽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1609년에 초판이 나온 이래 세계의 독자들은 각자 자신의 연애를 투사하기 좋은 개별 시편들을 찾아내 향유해왔다.

18번 외에 인기가 높은 작품은 29, 43, 71, 73, 116, 130번 등이다. 그중에서도 73번은 강력한 우승 후보로서 (다소 시니컬한 시선으로 사랑의 심층을 들여다보는 138번과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지난해 초에 뒤늦게 번역되어 그간 좋은 소설에 충분히 단련된 독자들마저 탄식하게 만든 <스토너>(존 윌리엄스, 1965)는 초반 30쪽만 읽어도 눈물이 고이는 이상한 소설인데, 농민의 아들인 스토너가 농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영문학개론 시간에 이 73번 소네트를 읽고 문학에 눈을 떠서 처음으로 부모의 뜻을 거스르기로 결심하는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완전히 수긍할 수 있었다. 73번은 그렇게 삶을 다시 처음인 듯 살기 시작하게 만드는 시이기 때문이다.

화자는 세 개의 비유-이미지를 동원해 어떤 비가역적인 사태에 대해 말한다. 가을이 가면 만물이 헐벗는 겨울이 오듯이, 해가 지면 죽음 같은 밤이 황혼을 삼키듯이, 불탄 자리에 하얀 재가 남듯이,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사람은 늙는다는 것. 이 점에 유의하면 당신의 사랑은 더 강해져서 “그대가 머지않아 잃을 수밖에 없는 그것”을 더욱 사랑하게 된다는 것. 그런데 이 마지막 구절은 좀 모호한 데가 있다. 그대가 잃을/떠날 수밖에 없는(“thou must leave”) 그것이란 대체 무엇인가. 청자인 그대 자신의 젊음인가, 아니면 화자인 나의 생명인가. 전자라면 젊을 때 더 열정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되고, 후자라면 누군가가 살아있을 때 그에게 더 잘하라는 뜻이 된다.

이는 영어권 독자와 학자들 사이에서도 오랫동안 논쟁거리였다. 해당 구절의 구조상 그대가 불가항력적으로 잃을/떠날 수밖에 없는 ‘그것’이란 아무래도 그 자신의 젊음이라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다는 의견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154개의 소네트를 하나의 총체로 보는 그린블랫 같은 이들처럼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연상의 시인이 연하의 청년에게 하는 말이라는 관점을 고수한다면, 연상의 화자가 연하의 상대에게 애절하게 강조할 만한 것은 자신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이라고 간주하는 것도 합리적이다. 게다가 이 73번 전후의 작품들이 공통적으로 화자 자신의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다는 사실도 이 견해를 지지한다.

나는 심지어 제3의 가능성까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시를 견인하는 구절이 “그대는 내게서 보리라”(thou mayst in me behold) 혹은 “내게서 그대는 보리라”(in me thou seest)라는 점이 의미심장해서다. 이런 표현들이 미묘하게 강조하는 것은, 겨울이 오고 해가 지고 불이 꺼지는 그런 변화들 자체가 아니라, 그런 소멸의 풍경들을 ‘그대’가 ‘내 안에서’(in me) ‘본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에 대한 이야기다. 내가 변함없이 존재하더라도 그대는 나를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이고, 그대가 그렇게 보는 것을 내가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속에서 늙는 것은 나나 그대가 아니라 오히려 사랑 그 자체라는 뜻이 아닌가.

시인은 늙는다. 물론 청년도 늙는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사랑이 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모호성은 즐길 만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 시의 주제 선율과도 같은 또렷한 메시지를 흔들지는 못한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시간이 많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진부한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청년도 내 안에는 있다. 그러나 내가 나에게서 황폐한 성가대석과 저무는 해와 하얀 잿더미들을 보게 될 날이 그리 천천히 오지는 않을 것임을 알아차린 시인도 내 안에 있다. 나는 내 안의 청년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서 삶을 더 사랑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 청년은 고집이 세고 기억력도 나쁘다. 셰익스피어가 옳다. 그가 언제 틀린 적이 있었던가.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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