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꽃 찜짱
이른 아침 뜰에 나가 수련꽃을 땄네
폭탄 구덩이 아래 어머니가 심은 수련꽃
아아, 어디가 아프기에 물밑 바닥부터
잔물결 끝도 없이 일렁이는가
몇 해 지나 폭탄구덩이 여전히 거기 있어
야자수 이파리 푸른 물결을 덮고
아아, 우리 누이의 살점이던가
수련꽃 오늘 더욱 붉네
*번역: 구수정
*찜짱(1938~2011)
본명은 호반바. 대학 시절 응오딘지엠 정권 반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으나 탈옥했다. 이후 이름을 바꾸고 사이공에서 학업과 혁명활동을 계속했다. 1960년 다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석방 이후 남부 베트남 항전구에서 활동했다. 베트남 국민들의 애송시인 <수련꽃>(1965)에서 볼 수 있듯이, 작고 평범한 것들 속에서 결코 퇴색되어서는 안 될 가치를 찾아 큰 울림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기억된다. 2011년 간암으로 작고.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2008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였다. 버락 오바마에게 패했지만, 요즘 세 치 혀로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도널드 트럼프하고는 급 자체가 달랐다. 그는 1967년 스카이호크 조종사로 베트남전에 참전해 그해 10월에만 22차례 하노이를 폭격했다. 10월26일 그의 전폭기가 미사일을 맞고 추락한다. 천행으로 목숨을 건진 그는 저 악명 높은 ‘하노이 힐튼호텔’(호알로 감옥)에 수감되고, 두 팔이 부러진 상태에서도 구타와 고문을 당했다. 이듬해 그의 아버지 잭 매케인 제독이 미국 태평양함대의 사령관이 되자 북베트남 당국은 조기석방을 제안했다. 당연히 자신들의 ‘인도주의’를 선전할 의도였다. 매케인은 거부했다. 그가 내세운 건 “먼저 들어온 사람이 먼저 나간다”는 군인 수칙이었다. 결국 그는 5년 6개월의 수감생활 끝에 파리평화조약이 체결되고 나서야 석방될 수 있었다. 평생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릴 수 없게 된 몸으로. 이 때문에 정치적으로 노선을 달리하는 미국인들도 그를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인정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베트남전 당시 정글을 장악한 것은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었지만, 하늘을 장악한 것은 미군이었다. 베트남전에서 미군은 800만톤 이상의 폭탄을 투하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참전국이 사용한 폭탄보다 세 배나 많은 양이었다. 위력으로 치면 히로시마 원자탄 640개와 맞먹는다는 분석도 있다.
아무리 이런 수치를 들어도 전쟁을 실감하기는 어렵다. 숫자와 통계 속에서 전쟁의 야만은 사라진다. 베트남전 당시 베트콩이었던 찜짱 시인은 이런 부조리한 계산법을 거부한다. 그에게 전쟁은 오히려 폭탄구덩이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수련꽃으로 기억된다. 그런데 오늘따라 연못의 잔물결이 눈을 찌른다. 수련꽃을 심었다는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다. 시인은 그저 잔물결 일렁일 때마다 까닭 없이 마음이 아플 따름이다. 다시 몇 해가 지났다. 연못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오늘따라 수련꽃은 더욱 붉다. 붉어서 더 아름다운, 아름다워서 더 슬픈 수련꽃. 시인은 그제야 곁에 없는 누이에 대해 말한다. 우리가 아는 사실은 그것뿐이다.
가슴이 먹먹했다. 전쟁은 존 매케인이 보여준 불굴의 용기로 기억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전쟁 아니겠는가. 지휘관들이 안전한 벙커 속에서 어떤 작전을 짜고 실행에 옮기든, 가장 많은 피를 흘리는 것은 민간인들이다. 죽은 자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살아남은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기억하는 일뿐인지 모른다. 이런 점에서 내게 세상의 모든 수련꽃은 이미 찜짱의 수련꽃이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우리가 읊고 기억하듯, 베트남인들은 찜짱의 ‘수련꽃’을 읊고 기억한다.
2011년 가을, 마침 하노이에 있을 때 시인의 부고를 접했다. 장례식에 참석할 수는 없었지만, 나는 당연히 파이프 담배를 멋지게 피워 물던 시인의 모습과 그의 수련꽃을 떠올렸다. 한반도 남과 북에서 서로 질세라 애국의 ‘단심’들이 극강의 위력을 과시하는 요즘, 그의 수련꽃은 어떤 색깔로 필 것인지!
김남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