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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전혀 우아하지 못하게

등록 2016-05-20 21:45수정 2016-05-22 10:28

김사월의 시 목고리
목고리 황인숙

내가 마시는 한 잔의 커피
내가 보는 한 권의 책
내가 거는 한 통의 전화
내가 적선하는 한푼의 동전
그것은 내 피와 땀을 판 게 아니다.
그렇다고 불로소득도 아니지. 이 말은
불로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소득이 아니라는 거지.

그것은 말하자면, 그러니까,
빚-이었다는 건데, 빚- 그래, 피와 땀이 아니라
영혼을 판 것, 같은 기분을 주는 것이지.
급기야
이제는 더 이상 팔 영혼도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 영혼이라는 게 그렇게 값나가는 게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내가 평생 이 빚을
다 갚고 죽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지는데
오, 또, 생각하면, 생각하면
생각 끝에 떠오르는

오오 불쌍한 마틸드,
내 목걸이는 가짜였어!

마틸드도 있을라구.
나는 마땅히 치를 것을 치러야 할 뿐.
빚을 담보로, 비장하고 의연하게!

그런데…… 그렇더라도…… 그러니까 말이에요.
오오, 마틸드, 내 목고리는 진짜예요!

무어니 무어니 해도
나를 미치게 하는 건
이 목고리가
참으로 우아하지 못하다는 것

빚을 졌다. 매번 빚을 졌지만 이번은 좀 달랐다. 안 쓰는 장비들을 팔았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사실 빚 때문이 아니더라도 당장 생활비가 없어서 아르바이트는 해야 했다. 내가 시작한 일은 카페 아르바이트다. 음료를 만들고 서빙하고 정리하면 한 시간에 5000원을 벌 수 있었다. 여섯 시간을 일하면 삼만원, 임금은 매일의 근무가 끝나면 현금으로 받았다. 약간의 생활비를 제외하고 매일 빚을 갚는 데 썼다. 조급했다. 하루에 삼만원을 벌어서 5일을 일하면 15만원이구나, 주말을 풀로 일하면 어떨까? 새벽 근무를 하면? 초과근무를 하면… 그렇게 일의 시간을 늘려가며 조금씩 빚을 갚아갔다. 2014년 겨울이었다.

우습게도 그때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것은 ‘내가 빚을 짐으로 인해 인생의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닐까?’였다. 빚을 다 갚지 못하면 자연스럽게, 다 갚는다 해도 이후 밀려오는 자기혐오에 삶이 끝나는 것 이상으로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나에게 ‘14년 겨울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한다면 딱히 인상적인 일이 있었는지 단번에 생각해내기 어려울 정도인데도 말이다.

빚을 지고 한 달이 지났을 때 여러 가지 사사로운 돈들과 그동안의 아르바이트로 빚의 반 이상을 갚을 수 있었다. 당장 술을 사 마셨다. 일이 끝난 새벽이면 마트에서 제일 싸고 독한 것으로 골라 마셨다. 내가 술보다 싸고 독해 보일까봐 그랬다는 농담을 하고 싶지만 정말 부끄럽다. 술을 마실 돈으로 빚을 갚을 수는 없었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모든 것을 계속하기 힘들 것처럼 느껴졌다. 일을 하기 위해서 술을 샀다고 생각했다. 밤 열두시가 넘어간 동네 마트는 정신을 잃을 듯 밝았고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술을 사기 위해 어슬렁거렸다. 가득 쌓여 진열되어 있는 캔을 보고 있으면 삶은 절망밖에 없다고 느껴지는 듯했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며 나는 이듬해인 2015년 달력을 사고 싶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저 숫자가 단정히 달려 있는, 그걸 사서 책상 앞에 세워놓고는 내가 어떤 재화라도 소비하면 뒤로 밀려가고 마는 상환일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시간이 지나도 나에게 주어진 날들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싶었다. 알맞다고 생각되는 달력 옆에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더 싼 달력이 있었다. 그걸 사면 지금 나의 상황에는 더 좋겠지? 그 생각이 든 순간 내가 서 있던 대형 서점은 정말 어두워 보였다.

가수 김사월
가수 김사월
달력은 그냥 사고 싶던 것으로 샀다. 빚은 3개월쯤 되는 날에 다 갚았다. 지금의 나는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는다. 2015년에 개인 앨범을 한 장 냈고 그 활동과 부수적인 일들로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 활동이라는 것도 매일을 위해 매일 일하는 방식이다. 앨범에는 4년 전쯤부터 지금까지 만들고 쌓아두었던 생각들로 만든 곡들이 들어 있다.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정말 별로인 생각을 털어놓자면 내가 내놓은 영혼만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황인숙의 ‘목고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냥 턱, 하고 내려놓고 보여주는 것만 같아 좋아하는 시다. 사람마다 고유한 고결함이 있는가 하는 질문에 적어도 나에게는 그게 없다는 것과 당연하게도 그걸 팔수록 빚을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을 생각하며 어떤 방식이라도 결국 빚을 지는 삶인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나는 피와 땀을 팔기도 하고 영혼을 팔기도 하며 살아간다. 가치를 목에 걸기도 하고 그것에 목이 걸리기도 하며.

가수 김사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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