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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노란빛 유자 아홉 개의 노래

등록 2016-05-27 20:37수정 2016-05-29 09:44

김현성의 시 늦게 온 소포
늦게 온 소포 고두현

밤에 온 소포를 받고 문 닫지 못한다.
서투른 글씨로 동여맨 겹겹의 매듭마다
주름진 손마디 한데 묶여 도착한
어머니 겨울 안부, 남쪽 섬 먼 길을
해풍도 마르지 않고 바삐 왔구나

울타리 없는 곳에 혼자 남아
빈 지붕만 지키는 쓸쓸함
두터운 마분지에 싸고 또 싸서
속엣것보다 포장 더 무겁게 담아 보낸
소포 끈 찬찬히 풀다보면 낯선 서울살이
찌든 생활의 겉꺼풀들도 하나씩 벗겨지고
오래된 장갑 버선 한 짝
해진 내의까지 감기고 얽힌 무명실 줄 따라
펼쳐지더니 드디어 한지더미 속에서 놀란 듯
얼굴 내미는 남해산 유자 아홉 개

“큰집 뒤따메 올 유자가 잘 댔다고 몃개 따서 너어 보내니 춥을 때 다려 먹거라. 고생 만앗지야 봄볕치 풀리믄 또 조흔 일도 안 잇것나. 사람이 다 지 아래를 보고 사는 거라 어렵더라도 참고 반다시 몸만 성키 추스리라”

헤쳐놓았던 몇겹의 종이
다시 접었다 펼쳤다 밤새
남향의 문 닫지 못하고
무연히 콧등 시큰거려 내다본 밖으로
새벽 눈발이 하얗게 손 흔들며
글썽글썽 녹고 있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내가 쓴 노랫말처럼 군에 입대했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논산행 기차를 탔다. 12월의 기차 안은 짧은 머리보다 마음이 더 시렸다. 새삼 창밖의 풍경들이 영화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파란 양철대문 앞에서 손을 흔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이 자꾸 창밖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눈물이 어린 것인지 그날 가늘게 내린 눈발이 흘러내린 것인지.

낯선 행성에 내린 것이 이런 풍경일까? 영화에 등장하는 우주인처럼 건조한 먼지바람이 흩어지는 논산훈련소에 내가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누런 종이에 포장했다. 천천히 집주소를 적어내리는데 마음이 뭉클하다. 아들의 그 소포를 받으며 어머니는 낙엽 진 나무처럼 휑하시리라. 유품 같은 한 덩어리의 소포, 담긴 옷가지에서는 아들이 살아온 냄새가 배어 있다.

고두현 시인의 ‘늦게 온 소포’를 읽었다. 어머니와 남해의 이야기가 파도 되어 밀려온다. 맑은 남해의 햇빛과 해풍을 받은 유자 몇 개가 함께 왔다. 어머니의 익숙한 사투리로 옛집의 골목길을 훤하게 일러주며 ‘몸 건강하라’는 당부도 꼭꼭 담겨 있다. 포장이 풀릴세라 겹겹으로 싸인 그것을 펼치며 시인은 눈물방울을 적신다.

고두현의 시에는 유난히 두 단어가 눈에 띈다. ‘어머니’와 ‘남해’. 시인이 나고 자란 곳이기에 지극히 당연하겠지만, 시집을 읽다 보면 어느덧 남해 바닷가에 가 있음을 느낀다. 유자나무 가지가 담 너머로 넘어와 ‘나 잘 익었어요’ 하며 노란빛을 선보인다. 지나가는 누군가를 위해 몇 알 때구루루 떨어뜨린다. 요즘같이 각박한 일상에서 시를 읽는 일은 더욱 필요하다. 시인이 바라본 풍경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어느 때는 시 한 편이 소설 한 편의 역할을 한다. 백석 시인의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가 그러하며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이 그렇다. 시의 문장은 짧고, 여운은 다시 길게 길을 보여준다. 디지털기기에 익숙한 오늘날 사색의 힘은 매우 약해졌다. 의미없는 기호 같은 언어가 불쑥 튀어나오기도 한다.

오랫동안 노랫말을 쓰면서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 많은 시집들을 읽으며 시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지난해 음반으로 내놓은 <윤동주의 노래>는 몇 년간 읽은 윤동주의 대표시들을 노래했다. ‘늦게 온 소포’에 노래를 붙이고 홀로 방안에서 눈물 글썽였다. ‘남녘 장마 진다 소리에/ 습관처럼 안부 전화 누르다가/ 아 이젠 안 계시지’ ‘한여름’이라는 짧은 시에 기타가 울고 나도 울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이다. 나머지 여러 편의 시에 곡을 붙이고 ‘어머니와 詩와 남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사회 아닌가. 울지 못하게 하는 속도 중심의 사회가 자칫 난폭해지게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빠르게 앞으로만 달려온 우리 사회이다. 때마다 꽃 피고 새잎 돋고 하는 것 미처 못 보고 지나가는.

김현성 작곡가·가수
김현성 작곡가·가수
‘늦게 온 소포’를 기다린다. 거기에 담겨 있을 어머니의 눈빛과 마음을 기다린다. 막차의 불빛이 아름답다. 늦은 아버지들의 발걸음 소리도 아름답다. 늦은 밤 누군가 기다리는 저 집의 불빛이 아름답다. 내 노래는 그 늦은 것들과 함께하고 싶다.

김현성 작곡가·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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