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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단 한 번의 만남이 남긴 것

등록 2016-05-27 20:46수정 2016-05-29 09:44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신형철의 격주시화 (隔週詩話)
-14년 동안의 애도 작업
발사체(the projectile)
-무라카미 하루키를 위하여

레이먼드 카버

우리는 차를 홀짝였다.
내 책이 당신의 나라에서 성공하게 된
타당한 이유들에 대해 점잖게 사색하면서.
당신이 내 소설들에 되풀이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한
고통과 굴욕에 대한 대화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순전한 우연이라는 그 요소에 대해서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이
팔릴만한 것으로 옮겨졌을까.
나는 방 한 구석을 응시했다.
그리고 잠깐이나마 다시 16살이 되어
대여섯 명의 녀석들과 함께
50년대식 닷지(Dodge) 세단을 타고
기우뚱대며 눈길을 달렸다.
고함을 지르고
눈뭉치와 자갈과 오래된 나뭇가지들을 던지며 공격하는
다른 녀석들에게 손가락 욕설을 날려주었다.
우리는 급회전을 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 우리는 그쯤에서 끝내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내 쪽 창문이 3인치 정도 내려와 있었다.
3인치 말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역겨운 말을 외쳤을 때
그 녀석이 뭔가 던질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를 돌이켜볼 수 있는
지금, 이라고 하는 이 유리한 위치에서는
그것이 공기를 가르고 고속으로 날아오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자기가 있는 쪽으로
유탄이 날아오는 것을
무시무시한 매혹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서 지켜보는 19세기의 초의 군인들처럼
내가 주시하는 동안 그것이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그때는 그것을 못 봤다.
나는 이미 고개를 돌려
친구들과 함께 웃고 있었다.
무언가가 날아와 내 옆머리를 강력하게 가격해서
내 고막을 망가뜨리고
내 무릎에 떨어졌다,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채.
얼음과 눈으로 꽉 채워진 공.
굉장한 고통이었다.
굉장한 굴욕이었다.
횡재다, 기괴한 사고야, 백만분의 일 확률이잖아!
라고 소리를 지르는 터프 가이들 앞에서
나는 울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끔찍한 일이었다.
그것을 던진 그 녀석,
환성이 쏟아지고 남들이 등 두들겨 주었을 때
그 자신도 놀랐고 또 뿌듯했으리라.
바지에 손을 쓰윽 닦고는 좀 더 빈둥대다가
저녁을 먹으러 집에 갔을 것이다.
그도 자라서 제 나름의 좌절을 겪고
인생에서 길을 잃기도 했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날 오후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생각해야 할 것들은 언제나 너무 많다.
멍청한 차가 멍청한 길로 미끄러져
멍청한 모퉁이를 돌아 사라져버린 일 따위를 왜 기억하겠는가.
우리는 방에서 점잖게 찻잔을 들어 올렸다.
잠시 동안 뭔가 다른 것이 들어왔었던 방에서.

*시집 <울트라마린(Ultramarine)>(1986)

부기: 필자의 초역을 읽어준 비평가이자 번역가인 문강형준 선생에게 감사드린다. 원시의 행 배열을 완벽히 재현하지 못한 것에 독자 여러분의 양해를 구한다.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시의 제목을 ‘던지다’(投げる)로 옮겼다.

무라카미 하루키(1949~)가 레이먼드 카버(1938~1988)의 소설을 번역하기 시작한 것은 1983년이었다. 곧 무라카미가 직접 선정·번역한 일곱 편의 소설이 <내가 전화를 거는 장소>라는 제목의 선집으로 출간됐고 이 책은 일본에서 호평을 받았다. 1984년에 무라카미가 포트 앤젤레스에 살고 있는 카버를 방문한 것은 그 소식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카버의 거대한 체구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에 대해 회고하기를, “이렇게까지 커질 생각은 없었다는 듯이” 어쩐지 좀 미안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작품을 쓰는 작가라면 아무래도 거인이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는, 재미있으나 알쏭달쏭한 말을 덧붙였다.

이후에도 무라카미는 카버의 작품을 해설하거나 1984년의 만남을 회상하는 글을 여러 편 썼다. 한국에도 번역돼 있기 때문에 무라카미나 카버 둘 중 한 사람의 애독자라면 그 글의 존재를 알 것이다. [예컨대 <잡문집>(비채, 2011)에 수록돼 있는 ‘레이먼드 카버의 세계’, ‘단 한 번의 만남이 남긴 것’ 등.] 그러나 무라카미 쪽이 아니라 카버 역시도 그날의 만남과 관련된 작품을 발표한 적이 있다는 것은 덜 알려져 있다. 세 번째 시집 <울트라마린>(1986)에 수록된 시 ‘발사체―무라카미 하루키를 위하여’가 그것이다. 10대 시절을 회상하는 시인데,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강, 2012)은 시에 묘사된 야키마 고등학교 시절 카버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시절에는 자동차가 여가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의 문화적 취향의 중심이었는데, 레이[레이먼드의 애칭―인용자]는 한 번도 자동차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는 다른 아이들처럼 엔진을 가지고 뭔가를 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동차를 유지하기 위해 일자리를 얻으려 하지도 않았다. 야키마의 소년들이라면 보도 표면에 직접 발을 대고 다니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할 나이가 훨씬 지날 때까지도 레이는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돌아다니곤 했다. 그러나 레이는 친구들과는 함께 차를 타고 다녔는데, 특히 51년형 엔진을 넣은 제리[당시 카버의 친구―인용자]의 41년형 올스모빌 컨버터블을 많이 타고 다녔다.”(75쪽)

시 ‘발사체’는 카버가 친구들과 함께 차를(시에서는 ‘세단’이고 평전에서는 ‘컨버터블’이지만 어쨌든) 타고 다니던 그 시절의 일화를 다룬 것이다. 카버와 그의 소년들이 차를 타고 동네를 휘젓고 다니다가 다른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었다. 저쪽이 뭔가를 집어 던지는 식으로 공격을 해도 카버 일행은 차를 타고 있으니 가운뎃손가락이나 세우는 식으로 느긋하게 약을 올리면 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카버가 친구들과 낄낄거리며 이제 그만 가자는 말을 나눌 무렵, 불과 3인치(=7.62센티미터) 밖에 안 되는 창문 틈으로 무언가가 날아 들어온다.

3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생각할 때면 그 상황이 전쟁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장하게 떠오르는 것이지만 그때는 미처 보지 못했다. 갑자기 날아온 단단한 ‘발사체’에 그는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무라카미가 카버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요소라고 지적한 것들, 즉 고통, 굴욕, 우연이 이미 다 들어있다. 얼음과 눈을 뭉친 것이었으니 흉기라고 해야 할 것에 맞아 고막이 터졌는데(고통), 친구라는 놈들은 그것이 3인치의 틈을 통과해 제 친구에게 명중했다는 놀라운 결과(우연)에 오히려 난리법석이고, 그런 그들 앞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자신이 카버는 끔찍했다(굴욕).

그러니까 일본에서 날아온 어느 젊은 작가의 지적은 카버 문학의 근원 감정을 정확히 건드린 것이었고 덕분에 카버는 제 인생의 원(原)장면 중 하나인 그날을 새삼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문득 궁금해졌다. 나와는 반대로 그 놀라운 우연 덕에 잠시나마 의기양양할 수 있었던 그 녀석은 이후 어찌되었을까. “그는 그날 오후에 대해 다시는 생각하지 않았으리라.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맞은 사람은 잊지 못하지만 맞힌 사람은 잊는다는 것.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그런 원장면이 있지 않은가. 바로 그것 때문에 이후 내내 일이 안 풀렸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일이 안 풀릴 때마다 곰곰이 돌이켜 생각해보게 되는 어떤 사건 혹은 장면.

그러나 우연과 고통과 굴욕이 카버의 생을 끝내 지배하지는 못했다는 감동적인 결론도 적어야 하리라. ‘만년의 조각글’(late fragment)이라 이름 붙여진 미완성 시가 있다. 이 작품이 사후 출간된 시전집 <우리 모두>(all of us, 2000)의 맨 끝에 수록된 것은 카버가 자문자답 형식으로 자신의 생을 총평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영화 <버드맨>의 도입부에 에피그램으로 삽입되기도 했다.) 전문을 옮긴다. “그렇긴 하지만 그래도 너는 / 이번 생에서 네가 얻고자 한 것을 얻었는가? / 그렇다. / 무엇을 원했는가? / 이 지상에서, 나를 사랑받는 사람이라 부를 수 있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우리가 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가장 진솔한 이유를 말하고 있는 이 시에서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단 한 글자도 없다.

19세에 결혼해 두 아이를 낳고 생계를 위해 온갖 일을 전전하며 알코올중독과도 싸워야 했던 그가 쉰의 나이에 자신은 충분히 사랑받았다고 말하며 세상을 떠났다. 덧붙이자면, 작가로서 그를 가장 사랑한 사람은 무라카미 하루키였다고 해야 하리라. 1988년에 일본 방문을 앞두고 카버가 죽자 그는 충격 속에서 일본어판 카버 전집 출간을 결심한다. 제1권이 1990년에, 제8권이 2004년에 나왔으니, 무려 14년 동안의 애도 작업이었다. 전집 완간 직후 그는 이렇게 적었다. “결국 한 번 밖에 그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 단 한 번의 만남이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깊은 온기를 남겼다. 고마워요, 레이.”(<잡문집>, 325쪽) 누가 더라고 할 것 없이 부러운 두 사람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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