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규,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이준규
복도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시집 <삼척> 수록-
이준규
인생이라는 이름의 복도 어떤 불안과 정념이 시 ‘복도’를 쓰게 했노라고 이준규는 말한다. 비단 ‘복도’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규의 시는 불안과 정념의 끝에 미세한 기록장치를 달아두고, 그것이 떨며 그려내는 파동을 언어화한 것이다. 이 언어는 “조금 미쳐 있다”. 불안과 정념은 대상이 없거나 모호한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정념의 파동은 비슷한 영역을 무한 왕복하면서, 같고도 다른 모양의 조밀한 삶의 그래프를 생성해 낸다. 이 삶의 그래프를 아무리 들여다봐야 뾰족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명쾌한 이론을 만들 수도 없다. 불안과 정념이 삶을 지배하는 것인지, 삶이 있기에 불안과 정념이 파생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불안한 자가 정념을 갖다니, 좀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념이란, 대상 없는 불안에 휩싸인 존재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휘하는,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들을 떠나, 다시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가려는 존재의 기묘하고 고독한 열정. 이 불안과 정념이 흐르는 통로가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그 끝에 도사린 것은 소멸의 예감이다.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이 무시무시한 복도의 이름은 ‘인생’이다. 오직 복도로만 이루어진 인생이라는 구조물을, 이준규는 자주 ‘시’라고도 부른다. 반복은 불안(한 삶)의 구조이자 화법이다. 불안은 반복되고, 불안이 반복되는 것은 삶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언어는 불안의 증상이자, 불안을 치유하는 동종요법의 기술이다. “복도는 복도다”, “공원이 있다”, “이 비는 좋다” 등등 가장 확실한 ‘있음’과 ‘느낌’에 대한 진술을 반복하는 동안, 사이사이 우리는 다른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다른 삶의 기분을 담아서.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아마도 삶의 텅 빈 내용물이며, 끝내 실체를 알 수 없는 삶의 기분과 감정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없는 삶을 향해 걸어”간다.(‘세월’)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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