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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부질없는

등록 2016-05-27 20:50수정 2016-05-28 11:29

이준규, 나의 시를 말한다
이 주의 시인 이준규

복도

복도는 복도다, 복도는 걸어갈 수 있고, 복도는 서서 끝을 볼 수 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복도는 말이 없고, 겨울밤의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복도에는 달빛이 흐르지 않고, 가로등빛이 흐르지 않고 복도의 불빛이 흐른다, 그것들은 흐르는 것들이다, 나는 복도의 끝에서 복도의 끝을 본다, 문을 열면서, 복도의 끝을 바라보면,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너를 생각한다, 나는 그를 생각한다, 조금 미쳐서, 고개를 숙이고, 어떤 감동이 있는가, 누구에게도 묻지 않는다, 복도에는 창이 있고, 창밖에는 나무가 있고, 나무의 밖에는 세상이 있고, 세상의 밖에는 망설임이 있고, 망설임의 밖에는 황당함이 있고, 황당함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것 말고는, 내가 너에게 이 시를 줄 것 같으냐, 나는 조금 미쳐 있고, 조금 미쳐서 겨울밤의 이 누추한 시를 쓰고 있다, 복도는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나는 복도에서 무언가 망설였다, 창을 열면서, 너를 사랑했다, 창을 닫으면서, 너를 사랑했다, 복도는 망설이는 곳이다, 우주처럼, 복도는 우선 복도다, 복도는 하나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두 개의 지평을 가지며, 복도는 세 개의 지평을 가진다, 복도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복도에 신문이 떨어질 때, 복도에 아이들이 뛰어갈 때, 복도에 세탁부가 지나갈 때, 복도에 손님이 지나갈 때, 복도는 여전히 복도다, 복도는 우울하다, 복도는 조금 휘어 있다, 복도는 정확한 직선이 아니다, 복도는 조금 미쳐 있다, 조금 미치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복도는 조금 미친 복도다, 복도는 깨끗하지 않다, 복도에서 벗어나야 한다, 복도에서 벗어나 문을 열고 마루로 진입해야 한다, 나는 복도에 문득 서 있었다, 복도의 다른 끝에 당신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복도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복도, 우리의 시.

-시집 <삼척> 수록-

최악의 슬럼프다. 어느 정도냐 하면, 시를 그만 쓰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는 정도다. 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아니다, 쓸 것은 전에도 없었다. 단지 쓰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쓸 것이 없어도 쓰고 싶은 마음이 들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쓸 수 있었다는 말인데, 지금은 그 감정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그동안 무엇을 썼는지 생각해 보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도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연락을 받았을 때, 마감이 다가올 무렵이면 내 상태가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더 나빠지기만 한다. 그래도 써본다. 복도라는 시. 이 시는 시집 <삼척>에 있는 시다. 다시 읽기가 두렵다. 읽어본다. 미숙하고 불안하게 느껴진다. 미숙하다니, 어떤 의미에서 그렇다는 것인가. 이것이 미숙하다면, 무언가 원숙하게 표현할 것이라도 있었다는 말인가. 그럴 수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 이런 정서가? 이 시를 쓰던 때는 어떤 혼란과 욕망과 환상과 꿈과 절망이 혼란스럽게 내 주위를 감싸던 시절이었고 나는 그런 나의 느낌에 대해 쓸 수밖에 없었다. 다시 읽어 보니 나는 이 시가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될 수 없거나 그러면 오히려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통과 우울과 불안 따위가 아름답게 표현될 수 있을까?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렇게 보이는 시들은 지금 생각해 보면 고통과 우울과 불안을 어떤 장식이나 어떤 뉘앙스를 갖게 하려는 의도로 시에 끌어들인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그러니까 고통과 우울과 불안 따위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견딜 만한 것으로(또는 아름다운 것으로) 전환된 것들이다. 그런데, 그러면 그런 것들만 시인가. 그래야 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나는 그런 것이 모종의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습관에서 벗어나 날것을 드러낼 때도 시적인 성취가 있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시 ‘복도’는 어떤 정념과 불안 따위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듯하다. 시적 아름다움은 충분히 얻지 못했으나 불안 따위의 정서는 더 잘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시에는 오랫동안 반복하여 꾸던 꿈의 이미지가 나온다. 그 꿈은 이상한 꿈이었고 무서운 꿈이었는데, 왜 그런 꿈을 내가 꾸게 되었는지, 왜 그 꿈을 한동안 반복하여 꾸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꿈은 대략 이렇다. 복도가 있고 내가 있다. 복도의 끝에는 타오르는 용광로가 있다. 나는 용광로 방향으로 걷는다. 나는 조금 몸이 뜨고 그대로 날아서 용광로로 빨려 들어간다. 나는 그 꿈을 좀 특별하게 생각한 것 같고, 그런 꿈을 꾸는 나 자신도 특별하게 생각하고 싶어 한 것 같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성향이 나를 시 쓰는 사람으로 만들었고 나는 소위 시인이 된 셈이다. 나는 그 이상한 꿈의 이미지를 왜 이 시에 사용했는가. 지금 그것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그런데, 나는 비교적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겉으로는 그렇다. 슬럼프니 슬픔이니 허무니 해도 겉으로는 별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도 문득, 가령 이 시에서처럼 어떤 복도를 걷고 있을 때, 또는 어디에서건 홀로 있을 때, 존재의 공허와 함께 존재의 무력감, 존재의 극미함, 존재의 흩어짐 따위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은 자주 있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거의 매번 그런 느낌을 갖는 것 같다. 이런 느낌은 곧 허망한 죽음을 생각하게 되니 우울하고 불안하고 슬프다. 이런 나의 필멸의 운명 앞에서 나는 속수무책의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내가 애써 무슨 짓을 한다고 해도,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는 이러한 파편화되고 불안한 정서를 시로 바꾸면서,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모종의 극단적인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모든 종류의 슬픔이 어떤 숭고한 것으로 바뀌면서 정화된다고나 할까. 이런 감정 역시 순간적인 것이어서 늘 다시 쓰게 되는 셈이다. 또 이 감정을 독자와 나누고 싶어 하는 욕망 역시 큰 것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왜 책을 만들겠는가. 어쨌든, 부질없는 삶을 부질없는 시로 버티고 있는 셈이다. 요즘 쓰는 시는 더 산문적이고 담담한데, 그렇다고 느낌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어쨌든 계속 쓸 것이다.

이준규
이준규
이준규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자폐’ 외 3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으로 <흑백> <토마토가 익어가는 계절> <네모> 등을 냈다.



인생이라는 이름의 복도

어떤 불안과 정념이 시 ‘복도’를 쓰게 했노라고 이준규는 말한다. 비단 ‘복도’만은 아닐 것이다. 이준규의 시는 불안과 정념의 끝에 미세한 기록장치를 달아두고, 그것이 떨며 그려내는 파동을 언어화한 것이다. 이 언어는 “조금 미쳐 있다”. 불안과 정념은 대상이 없거나 모호한 것이 특징이기 때문이다. 불안과 정념의 파동은 비슷한 영역을 무한 왕복하면서, 같고도 다른 모양의 조밀한 삶의 그래프를 생성해 낸다. 이 삶의 그래프를 아무리 들여다봐야 뾰족한 해석은 불가능하다. 명쾌한 이론을 만들 수도 없다. 불안과 정념이 삶을 지배하는 것인지, 삶이 있기에 불안과 정념이 파생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진다.

불안한 자가 정념을 갖다니, 좀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 정념이란, 대상 없는 불안에 휩싸인 존재가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휘하는,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에너지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들을 떠나, 다시 알 수 없는 것을 향해 가려는 존재의 기묘하고 고독한 열정. 이 불안과 정념이 흐르는 통로가 ‘복도’다. “복도에는 어떤 것들이 흐른다,” 그 끝에 도사린 것은 소멸의 예감이다. “그 끝은, 어떤 아가리 같다, 용광로, 조금 떠서 날아가면 그 용광로에 삼켜질 수 있을 것 같은,” 이 무시무시한 복도의 이름은 ‘인생’이다. 오직 복도로만 이루어진 인생이라는 구조물을, 이준규는 자주 ‘시’라고도 부른다.

반복은 불안(한 삶)의 구조이자 화법이다. 불안은 반복되고, 불안이 반복되는 것은 삶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언어는 불안의 증상이자, 불안을 치유하는 동종요법의 기술이다. “복도는 복도다”, “공원이 있다”, “이 비는 좋다” 등등 가장 확실한 ‘있음’과 ‘느낌’에 대한 진술을 반복하는 동안, 사이사이 우리는 다른 문장을 만들 수 있다. 다른 삶의 기분을 담아서. 우리가 반복하는 것은 아마도 삶의 텅 빈 내용물이며, 끝내 실체를 알 수 없는 삶의 기분과 감정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없는 삶을 향해 걸어”간다.(‘세월’)

김수이/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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