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문학과지성사, 2013)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고전 <죽음과 죽어감에 대하여>(On Death and Dying, 1969)에 따르면 죽음을 앞둔 사람은 다음 다섯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 단계는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니 그럴 리가 없어’라고 생각하는 부정(denial)이다. 그러다 더는 부정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왜 하필 나인가 하는 분노(anger)를 느낀다. 그 뒤에는 협상(bargaining)을 시도하기도 한다. 지금까지와는 달라질 테니 한 번만 더 (혹은 조금만 더) 기회를 달라는 것.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확실해지면 거대한 상실감이 우울(depression)을 불러온다. 그러고는 마지막, 수용(acceptance)의 단계가 온다. “감정의 공백기”다. 이제 그만 쉬고 싶다는, 텅 빈 마음의 상태.
죽음에 관해서라면 ‘단 한 권의 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보편적인 찬사를 받아온 소설은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1886)이다. 톨스토이는, ‘퀴블러로스 모델’보다 한참 더 전에,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 내면의 추이를 섬세하게 보여주었다. 판사 이반은 성공의 절정에서 불치병에 걸리는데,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동안 자신이 완전히 잘못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한 걸음씩 산을 오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한 걸음씩 산을 내려가고 있었던 거야.”(창비, 103쪽) 어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서만 자신의 삶을 정확하게 인식(평가)할 수 있다는 것. 제 삶의 진실을 처음으로 깨닫고 정확히 3일 뒤에 그는 죽는다.
이것이 죽음이라는 사건의 역설이다. ‘사건’은 진실을 산출하고 우리를 그것과 대면하게 해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일인데, 죽음 없이는 결코 깨달을 수 없는 진실이라는 것이 있다면, 죽음은 그야말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약한 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실(내 인생이 엉터리라는 것)을 알려주는 죽음이 그 진실에 응답할 기회까지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제대로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더는 살 시간이 남지 않은 것이다.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사람이 있다면 이후 그의 삶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확연히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드물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의 한 대목에서 지나가듯 톨스토이의 저 소설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는 이반 일리치의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말로 죽기 전에’ 미리 죽어보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요지의 말을 했다. ‘죽음이라는 가능성으로의 선구(先驅, 미리 달려감)’라는 어려운 말이 뜻하는 바가 대략 그렇다. 물론 그것은 자살과는 다르다.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문예출판사)를 보면 실비아 플라스는 1959년 2월28일에 <이반>을 다 읽고 이를 걸작이라 평했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설은 그로부터 4년 뒤인 1963년 2월에 그녀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불가피했을 그 죽음을 과연 누가 막아낼 수 있었을까.)
하이데거는 죽음을 내내 ‘가능성’이라는 말로 지칭한다. 그리고 자살은 ‘죽음이라는 가능성’의 그 가능성을 없애는 일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무엇에 대한 가능성일까? 진정한 삶(“본래적 실존”)을 살기 위한 가능성이다. 우리는 ‘인간은 죽는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고로 카이사르도 죽는다’라는 것을 알지만, 인간 일반이 아니라 나 자신의 죽음은 언제나 ‘아직은 아닌’ 일처럼 생각하며 산다. 본래성이 아닌 일상성의 세계에서, 그러니까 거짓된 망각의 세계 속에서 말이다.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와서 내 죽음과 대면해야 비로소 진정한 삶을 살 수 있으니 바로 그런 가능성의 지평으로 나아가라는 것. 그런데 그것은 무엇일까,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본다는 것은?
한강의 시를 읽으며 그 물음과 또 한 번 대면했다.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문학과지성사)에는 아름다운 시가 많은데 내가 유독 ‘서시’에 끌린 것은 언젠가부터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때가 잦아진 탓이다. 그런데 이 시는 죽음에 대한 시가 맞기는 한가?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운명을 만나 그가 내게 행한 일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는 때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아닐까. 그러니 죽음에 대한 시가 맞을 것이다. 아니, 맞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독특하고 아름다운 죽음의 시라고 해야 하리라.
운명을 이렇게 그릴 수 있다니 말이다. 운명이 고전 비극에서처럼 대결과 투쟁의 대상으로 그려지거나, 간구하고 복종해야 할 초월자/절대자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 이 시의 빛나는 착상은 운명을 의인화한 데에, 게다가 수평적으로 평등한 대상으로 설정한 데에 있다. 이 운명은 내 앞에 나타나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 운명이다. 어떻게 이 운명의 멱살을 잡거나 그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는가. 화자는 운명과의 만남을 미리 상상해 본다. 제 운명을 껴안아주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를 생각한다. 이것은 마치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모녀가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최초의 상봉을 앞두고 하는 생각들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날이 오면 화자는 말을 아끼겠노라고 말한다. 말없이도 서로를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므로. 떨어져 있었지만 늘 함께였던 나와 내 운명, 그 애증의 세월을 이제는 다 뛰어넘어서는, 그저 운명의 얼굴을, 그 얼굴에 새겨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보겠다는 것. 그것은 곧 내 삶의 “그늘과 빛”이기도 할 것이기에. 운명이 눈물을 흘리기라도 한 것일까? 화자가 운명의 ‘얼룩진 뺨’에 가만히 두 손을 얹으면서 이 시는 끝난다. 이 만남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죽음으로 미리 달려가 보는 일이 지금 이 삶을 위한 것이었듯, 최후의 순간에나 가능할 운명과의 만남을 당겨 상상해보는 것 역시 내가 지금 살고 싶은 삶이 어떤 것인지를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것을 ‘원한 없는 삶’이라고 부르고 싶다. 내 삶이 어떤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졌더라도/얼룩지더라도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겠다는 마음. 그런 마음으로, 윤동주의 같은 제목의 시에서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고요히 걸어가겠다는 다짐으로서의 서시. 그런데 서시란 서문을 대신하는 시이므로 시집 맨 앞에 있어야 할 텐데 어째서 한강의 ‘서시’는 시집의 끝에 있는가. 죽음에 대한 시이기 때문일 것이다. 죽음이라는 사건은 인생의 끝에서야 쓰게 되는 서시 같은 것이므로. 그때서야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다시 처음인 듯 살아가고 싶어지니까. 그러나 그건 너무 늦지 않은가. 그러니 나는 미리 써야 하고 매일 써야 한다. 나는 죽는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시를.
신형철 문학평론가·조선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