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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병든 서울서 늦게 핀 무죄를 보았네

등록 2016-08-19 19:13수정 2016-08-20 17:48

[토요판] 송수정의 시, 수선화
수선화 이광웅

내 생애에서의 영원이란
그 해 봄
내게 머나먼 압록의 강물같이나 바라뵈던 복직이
명절같이나 찾아와
떠나야 했던 교직에 또 몸담아 살면서
귀여운 소년 소녀들에게 평화로이 우리 국어를 가르치던
그 학교
그 교정
그 화단 가운데
수선화 피인
갠 날이다.

수선화같이
혀끝으로 봄을 핥으려는
꼭이나 수선화의 생리를 지니인 사람을 흠모하기 비롯한
그 해 봄
그 갠 날이다.
내 생애에서의 영원이란
달리 마련이나 있을 것이 아니어서…….

빈 운동장 끝
그 해 봄
바람 많아 섧게도 꽃대 흔들려쌓는
한결 감옥에서 그리울, 한결 지옥에서 새로울…….

수선화 피인 갠 날이다.

-<수선화> 수록-

대학 시절이었다. 1993년 10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이 경희대에서 제1회 창작곡 경연 대회를 개최했다. 우연처럼 필연처럼 학과 선후배들과 함께 대회에 참가했다. 농촌 봉사활동을 계기로 우리 과와 자매결연을 맺은 당진군의 농민들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 따른 농산물 개방 문제로 대규모 상경 투쟁을 준비 중이라는 연락을 받았고, 약간의 활동비가 있으면 좋은 상황이었다. 대회의 상금은 솔깃한 유혹이었다.

출전곡은 같은 과 친구의 자작곡이었다. 과외를 해주던 고등학생이 성적 비관으로 세상을 떠난 후 맘고생을 하며 만든 노래였기에 허투루 부를 수 없는 무게가 있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우리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대상 다음이었다. 상금으로 맞춘 단체 티를 상경한 농민들과 함께 입고 청계천을 행진했다.

대회 당일에 사실은 조금 혼란스러운 마음이었다. 전북 대표로 참가한 어느 선생님이 불렀던 ‘수선화’라는 노래 때문이었다. 1년 전 세상을 떠난 이광웅 선생님을 기리기 위해 그분의 시에 곡을 붙였다고 들었다. 낯익은 이름. 그러나 이런 자리에서 듣게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셨다는 말은 더욱 믿기 어려웠다.

그 두 해 전 전주에서 재수를 할 때, 100명의 학생들이 뒤엉킨 창고 같은 교실에서 이광웅 선생님을 뵈었다. 가을쯤 갑작스럽게 교단에 선 선생님의 문학 수업은 족집게 정리로 현란한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꼭 들려줘야 하는 이야기가 있는 사람처럼 당신이 아끼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잔잔하게 이어나갔다. 정지용의 ‘향수’를 이야기할 때는 선생님과 함께 시인의 마을을 답사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재수생의 현실과 동떨어진 수업이었는데, 그래서 딴짓하는 학생들이 있긴 했는데, 누구도 불만을 표시하지는 않았다. 선생님은 요양 중이라고 느껴질 만큼 작고 힘들어 보이셨지만 눈이 맑고 말씨가 정갈하셨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잊을 수가 없는 이름. 그분의 진면목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재수생의 눈에도 범상치 않은 분이었다. 한 주에 한 번이 고작인 그분의 수업을 치유처럼 여행처럼 기다리는 낙으로 지리멸렬한 시간을 버텼다.

노래 대회 후 선생님의 시집을 구해 읽었다. 군산 제일고에서 국어 교사로 재직하던 1982년, 전형적인 용공조작 사건의 피해자로 온갖 고문과 험한 옥살이를 겪었던 시대의 희생양. 그분의 죄목은 이적단체 ‘오송회’를 결성해 학생들에게 불온사상을 전파했다는 것이었다. 1987년 사면되어 복직되었으나 전교조 활동으로 다시 해직을 겪어야 했다. ‘수선화’는 사면 후 학교로 다시 돌아간 날의 평화로움과 그리움을 담은 시였다. 오송회 사건의 피해자들이 드디어 무죄를 입증받은 건 2008년, 고문의 후유증과 암 투병으로 이미 세상과 작별한 선생님에게는 너무 늦은 소식이었다.

지난해 전북 진안의 계남정미소를 개조해 공동체 박물관을 운영하는 김지연 관장이 평소 가장 마음이 통하는 분의 시집이라며 김영춘 시인의 <나비의 사상>을 선물했다. 시집을 들추다 ‘이광웅 선생님을 그리워하면서’라는 부제가 붙은 시 한 편을 발견했다. 선생님은 아직도 그렇게 불쑥 내 앞에 나타난다. 오송회 사건의 발단은 선생님이 필사본으로 지니고 있던 오장환의 시집 <병든 서울>이었다. 동명의 시에서 오장환은 해방 직후 여전히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서울을 한탄한다. 선생님을 만난 건 25년 전이지만, 그 후 오히려 선생님과 조금씩 더 친해지는 기분이다. 여전히 오작동하는 병든 서울에서.

송수정 사진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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